한 때는 박경용, 서 벌 선생과 광화문에서
198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한다. 가끔씩 박경용 선생을 만나 찾아갔던 곳이 '시인통신'이라는 술집이다. 종로1가 뒷편에 자리 잡은 작은 술집이었다. 그때마다 우연히도 만나는 사람이 서벌 시인이었다. 만나면 언제나 이어지는 것이 설전이었다. 아마 맞수로서의 대결인듯 싶었다. 결코 승부가 나지 않는 그런 전쟁 같은.... 박경용 선생은 도무지 만날 수가 없고, 서벌 선생은 이미 작고 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 '시인통신'이 재개발 사업으로 없어지자 이에 대한 기사가 아래와 같이 신동아 잡지에 게재되었다.
지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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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 죽은 시인의 골목 ‘피맛골’ 아, ‘시통’의 시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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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장부 명단이 1000여 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 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 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 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길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19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 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한씨는 말한다. 그 많던 술꾼은 다 어디에…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서른네 살 때 과거를 때려치웠다.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닭벼슬보다 못한 벼슬 따위는 해서 뭐 하는가”라며 협객 백동수(1743~1816)를 길잡이로 삼아 전국을 떠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1741~1793), 이서구(1754~1825)도 함께했다. 이때 이덕무가 서른, 백동수가 스물여덟, 이서구가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개성 송도-평양-천마산-묘향산-속리산-가야산-충북 단양 등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질펀하게 울 만한 곳을 찾았다. “조선 천지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 원 없이 울어볼 만하다” 1980년대 이후 시통을 수없이 들락거렸던, 그 열혈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울고 있을까? 1987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 광화문 일대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다가, 밤 이슥해 시통에 들어서던, 그 자랑스러운 ‘해방전사’들은 앞으로 어디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릴까? 시통이 사라진 피맛길은 이제 ‘죽은 시인’의 골목이 되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