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문단소식

한 때는 박경용, 서 벌 선생과 광화문에서

설정(일산) 2009. 10. 4. 07:16

 

 

198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한다. 가끔씩 박경용 선생을 만나 찾아갔던 곳이 '시인통신'이라는 술집이다.

종로1가 뒷편에 자리 잡은 작은 술집이었다. 그때마다 우연히도 만나는 사람이 서벌 시인이었다. 만나면 언제나

이어지는 것이 설전이었다. 아마 맞수로서의 대결인듯 싶었다. 결코 승부가 나지 않는 그런 전쟁 같은....

박경용 선생은 도무지 만날 수가 없고, 서벌 선생은 이미 작고 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 '시인통신'이 재개발 사업으로 없어지자 이에 대한 기사가 아래와 같이 신동아 잡지에 게재되었다.

 

지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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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은 ‘酒黨’의 해방구 ‘시인통신’哀詞

죽은 시인의 골목 ‘피맛골’ 아, ‘시통’의 시대여!

 
 

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장부 명단이 1000여 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 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 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 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길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19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 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한씨는 말한다.

그 많던 술꾼은 다 어디에…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시통 식구들’

▼ 시인
강경훈 강만식 강태열 권경업 권일송 김규동 김선유 김송배 김신용 김여옥 김영철 김정웅 김종천 김춘랑 김하중 김홍성 마종하 민영 박건삼 박경용 박중식 박태진 백옥실 서벌 송길자 송동권 송동호 송재룡 송재율 송현 신경림 신세훈 신순애 신현배 안도선 안만식 안익수 오영수 우영창 이규헌 이규호 이근배 이도윤 이상범 이생진 이수화 이승철 이용범 이창년 이탄 이태근 이형덕 임문혁 장윤우 전종목 전연욱 정공채 조재훈 조해인 지성찬 진복희 진을주 최승호 최정자 하득용 한분순 허유 허홍구
▼ 소설가
구인환 김대수 김명조 김병총 김우영 김영현 김석태 김송배 김정례 마광수 박상우 송우혜 서해성 심명석 안장환 오인문 오성찬 엄광용 원형갑 유재용 윤후명 이동철 이동희 이세기 이완수 이원파 이외수 이정림 이호철 전범수 전상국 정건섭 정신재 정연희 정을병 조동수 조해인 최강록 천금성 표성흠 하성찬 하일지 하창수
▼ 수필가
김시원 정목일
▼ 문학평론가
신동한 이유식 윤병로 장백일 정신재 최동호 최학
▼ 아동문학가
박홍근 이상교 신현득 신형건
▼ 만화가
김 삼 한희작
▼ 화가
강용대 강찬모 강행복 김문조 김영미 박광호 박권수 박상희 백경학 서영준 서정태 손상기 송 똥 심문섭 이목일 전강호 전수창 정복수 최낙경
▼ 언론인
구본갑 국흥주 권영길 김광원 김동철 금동혁 김 성 김재곤 김종구 김종철 김중배 김지용 김지완 김태홍 김화성 김회평 문학진 박관일 박병서 안기석 엄광용 오광수 원용강 이관기 이도성 이세일 이승호 이점석 이평식 임형균 유보상 윤승용 손문상 신효정 정출도 천상기 최영록 황제연 허승호
▼ 사진작가
김성수 김수영 이남수 안성일 조준호 황상보
▼ 기타
재야논리학자 신성준, 산악인 박인식, 남난희, 작곡가 한돌, 전위예술가 무세중, 연극연출가 최유진, 연극인 이성룡, 영화감독 한옥희 이미례 이만,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방송작가 이은집, 철학박사 황필호, 장승조각가 김명덕, 치과의사 김윤만 이승건, 여행가 박세경,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번역가 김대웅 이상영,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사람과 산 홍석하, 그래픽디자이너 이관열, 다큐멘터리 작가 홍하상, 극작가 유보상, 민속학자 심우성, 문학통신 이지룡, 추리작가 정건섭, 교사 안철상, 사업가 김명성 이상일, 자유기고가 공정희, 해냄출판사 송영석, 방송인 김경원, 출판인 이정한, 북한산 지킴이 차준엽, 원강스님, 산하출판사 소병훈, 건축업자 이홍기, 영화평론가 한옥희, 인도여행사 정윤숙, 우리말갈래사전 박용수, 교수 이길주 서상문, 옹기쟁이 김용문, 변호사 김광정 박원순 윤학, 여행가 송일봉, PD 표재순, 문학박사 신철균, 치과의사 김영환, 새마을문고 강만식, 영국신사 김갑석, 교보생명 민욱과 그 일행….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서른네 살 때 과거를 때려치웠다.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닭벼슬보다 못한 벼슬 따위는 해서 뭐 하는가”라며 협객 백동수(1743~1816)를 길잡이로 삼아 전국을 떠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1741~1793), 이서구(1754~1825)도 함께했다. 이때 이덕무가 서른, 백동수가 스물여덟, 이서구가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개성 송도-평양-천마산-묘향산-속리산-가야산-충북 단양 등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질펀하게 울 만한 곳을 찾았다.

“조선 천지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 원 없이 울어볼 만하다”

1980년대 이후 시통을 수없이 들락거렸던, 그 열혈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울고 있을까? 1987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 광화문 일대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다가, 밤 이슥해 시통에 들어서던, 그 자랑스러운 ‘해방전사’들은 앞으로 어디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릴까? 시통이 사라진 피맛길은 이제 ‘죽은 시인’의 골목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