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택의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박주택
이 거리, 노래가 되다 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그림자
황혼이 붉게 벽을 물들일 즈음
바람은 열쇠가 채워져 있는 저녁의 문 앞에 서서
잠시 침묵에 섞인다 어렴풋이 평온의 편지인 벽은
글자들을 떨어뜨리고
봄은 어금니를 느리게 움직여
잎사귀를 갉는다 사람들 사이로 글자들이 떠다닌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그 글씨는 크게 일그러졌다
공기가 금빛 즙을 흘리는 저녁을 보라,
이따금 사람의 그림자들 사이로 거품이 일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 서로의 말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턱도 있다
그리하여 바람 부는 날이면
말들은 그림자의 심장을 향해 따뜻한 손을
집어넣고 고여 있는 구름들은 황혼에서 피워
올린 사람을 향해 뻗는다 적막에
황혼의 그림자들 서로에게 섞이며 침묵의 편지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