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모의 내가 읽은 좋은 시조(2009.12 스토리문학)
인고의 삶, 그리고 비유와 재미
권 혁 모
송(宋) 나라의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은 “알곡 하나에 세계가 들어 있고, 반 되들이 냄비 안에서 산천이 끓는다(一粒粟中藏世界, 半升鏜內煮山川)”라고 하였다. 작은 곡식 한 알과 작은 냄비 안에도 세상천지의 모든 이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한 알의 사과가 빨갛게 물드는 것도, 들녘의 오곡백과가 알알이 익어가는 것도, 그리고 구름이 하늘 멀리 흘러가는 것 등 모두 다 저마다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기실 불가에서 말하는 불성(佛性)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福音)도 거기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과학자이거나 종교인 혹은 예술가의 혜안으로 그 오묘한 이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에서는 한 여자를 요모조모 비유해 본 것이다. 보잘것없는 물푸레나무에 비유되는 오묘한 여자, 위대한 여자, 슬픔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를 발견한다.
『나는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여자.』
백수 정완영 선생은 하늘에 올라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가 지금 지구라는 곳에서 바라다보며 동경하는 그 하늘에서, 역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라는 곳에는 오작교도 있고,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도 흐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현상을 되돌리면 이렇듯 아름다운 꿈속 지구라는 하늘이건만, 인생은 그 무게를 더해갈수록 기쁨보다는 슬픔 쪽으로 비중을 더해 간다. 그래서 혼자 하늘로 떠나야 하는 슬픈 시가 있고, 그런 노래도 있나보다. 정완영 선생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이 눈길을 끌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지구도 하늘일거야 / 우리 마음 징검다리는 하늘나라 오작교이고 / 냇물에 엎드린 돌팍은 까막까치 어미일거야. // 나는 강 건너 마을 소를 타는 견우이고 / 순이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직녀일거야 / 밤이면 은하수 이야기 사랑 이야기 흐를거야.』
숫돌은 농촌이 아니면 대부분 집에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이제 칼을 가는데 쓰이는 숫돌은 우리의 생활과는 멀어지게 되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독일의 칼 메이커들, 평생을 쓰고 대물려도 좋을 주방 칼 세트가 큰 바다와 대륙을 건너 하늘 길로 건너오고 있다.
지난 시절 농경사회에선 삶의 행위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 칼이 아니었던가? 그 중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낫으로 소 먹일 꼴을 베었다. 논밭의 퇴비를 마련하는가 하면, 온갖 농작물을 수확하고 뒷정리를 하는데 사용되었다. 기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행위가 낫으로 비롯된다고 보면, 그 낫의 기능을 온전히 유지하기위한 것이 바로 숫돌인 것이다.
권갑하는 다 닳은 숫돌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찔한 날 선 삶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낫을 갈 듯 살아오신 아버님의 팔순 생애
등 굽어 푹 패인 가슴 허연 뼈로 누웠다.
-균형을 잘 잡아야 날이 안 넘는 겨
갈무린 기도문인 양 깃을 치며 솟는 햇살
하늘빛 흥건한 뼛가루 목숨인 양 뜨겁다
가슴 마구 들이치던 내 유년의 마른 바람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
촉촉한 귓전의 말씀 눈물 속에 날이 선다.
-권갑하의 <숫돌>, 시집 ‘외등의 시간’에서
단숨에 살을 베일 것 같이 날 선 삶, 권갑하는 <숫돌>에서 낫을 갈 듯 정교하게 살아온 부친을 화두로 삼았다. 아버지 나름으로의 진지한 삶을 영위한 숫돌은 이제 닳아서 허연 뼈로 누워 있다고 시작한다. 그런 다음 한 치 흐트림 없이 예리하게 칼을 가는 과정은 좌우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칼을 가는 동안 나오는 돌가루(볏가루)가 마치 목숨인 양 뜨겁다고 한다. 예리한 칼날을 가는 과정에서 물도 자주 뿌려야만 날이 상하지 않다는 당부를 회고하고 있다.
숫돌은 칼을 가는 데 필요한, 농경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도구이다. 그 숫돌로부터 아버지의 일생을 떠올리게 되고, 예리한 칼을 갈기 위하여 균형을 잡고, 물 뿌리고 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가 지나간 한 시대의 고뇌와, 그리고 뜨거운 가족애를 떠올리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권갑하의 시 작업은 이러한 회고의 정을 목적 지향적으로 전제하여 창작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숫돌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세월의 상처 같은 것을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시의 건강성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 제시에 있다고 본다면, 권갑하의 숫돌은 자칫 회고조로 여겨질 소제 같으면서도, 그러나 직접화법을 통한 현장감과 이것을 엮어가는 시적 긴장감으로 공감을 얻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솔희의 <한지> 역시 앞의 작품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지창 밖의 빛이 알맞게 배합되어 오는 은은한 빛 가리게, 그것은 유리창이라는 노출을 통하여 얻는 정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알맞게 가려서 얻는 긴장감이며, 빛과 그늘의 조화이다. 한지를 피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서정은 바로 이런데서 오는 단아함과 신비감이며, 적절하게 배합할 수 있는 끈기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한지창 안과 밖은 서로 분리되는 관계가 아니라, 빛과 소리를 알맞게 나누며 공존하게 하는 여유인 것이다.
눈부신 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가을국화꽃 문양을 넣은 새하얀 한지창이다. 한지창은 안과 밖을 조화시키는 매력이 있다. 창에 비치는 생략된 그림자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한지창을 통과한 은은한 빗소리는 그 풍경까지도 떠올리는 데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푸르던 팔 다리가 마디마디 껶여 지고
속살이 벗겨져 양잿물에 삶길 때는
곧았던 한 줄기 길이 아슴히 흐려졌다
운명 같은 주먹다짐 만신창이 된 꿈속에서
두고 온 고향 하늘은 노을 뒤로 사라지고
지통 속 소용돌이 따라 새롭게 열리던 길
찢긴 살 켜켜이 재워 숯불로 펴온 세월
온갖 세파 다스려 내는 풍경소린 듯 그윽하다
여름날, 따가운 햇살 품었다 은은하게 풀어내는
-이솔희의 <한지>, 스토리문학 10월호
이솔희의 <한지>는 한 목숨의 탄생이었다. 푸르던 팔다리가 마디마디 껶여지고, 양잿물에 삶기는 동안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였을 때, 인고의 과정은 풍경소린 듯 그윽하게 담을 수 있을 것이며, 무더운 여름날의 따가운 햇살을 잠시 품었다가 다시 풀어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유리창은 빛을 투과할 수 있고, 안고 밖을 확실하게 분리할 수 있다. 현대인은 그렇게 분리된 상태에서 보호받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우리라는 공간에서 함께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격리 상태에서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이솔희의 <한지>는 어렵게 탄생된 삶의 진지한 모습을, 한지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여 그 해법을 제시하는 듯하다. 유리창이 가져다주는, 흑백의 논리로만 가능한 디지털 세대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한지는 가르기가 아니라 조화를 위한 우리 민족의 눈부신 서정인인 것이다.
동백꽃은 청순, 붉다, 열정, 첫사랑, 순결, 그리움, 여성적, 생명, 추억 등 사색 쪽의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미자의 그 동백꽃이 아니더라도 이미 가슴 설레게 한다. 또한 단순한 꽃의 아름다움 너머 60~70년대 어렵게 살았던 사람들의 숱한 애환이 숨어 있다.
견디기 힘들어도 참는 만큼 하루가 붉다
손을 내밀수록 더 허기진 겨울 볕에
수줍게 볼을 비비며 말문 여는 저녁.
바람, 제주바람 숨긴 칼이 더 푸르다
눈 오면 눈밭에다 오장육부 쏟으시던
아버지 겨울나기도 저 꽃처럼 붉었을까
잠이 깊을수록 우리 꿈이 생시로 오듯
아픔이 깊을수록 봉오리에 힘 모으는
저 혼자 아껴온 불씨, 꽃 한 송이 내민다.
-한희정의 <동백꽃 서설>, 시집 ‘굿모닝 강아지풀’에서
한희정의 <동백꽃 서설>은 지난 시대 인고의 삶을 생각나게 한다. 동백 그 붉은색의 이미지에 더하여 그리움과 삶의 아픔이 진솔하게 묻어 있다. “힘들어도 참는 만큼 하루가 붉다”로 시작되는 처음부터 예사로이 떠올려 보는 그런 꽃이 아니었다. 꽃의 이미지는 허기진 겨울 볕에 수줍게 불을 부비며 다가오고 있었다.
칼날보다 푸른 바람 앞에 정열을 쏟아 삶을 영위하시던 아버지의 겨울도 꽃처럼 붉었다 한다. 나아가 아픔이 깊을수록 봉오리에 힘을 모아 동백꽃이라는 불씨 한 송이를 내민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소중한 인과응보요, 사필귀정이라 하였던가? 한희정은 <동백꽃 서설>에서 한 시대 삶의 무대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기도하고 있었다.
닳아 휘어진 숫돌에서 아버지에 비유해 보며, 한지에서 사람의 한 평생을, 그리고 동백꽃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적절한 비유는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하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인고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음은, 그만치 치열한 삶이 소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전개 과정은 관념 쪽으로 치우치거나, 이미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행위에 머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시의 진정성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 가운데에서도 운(韻)과 율(律)이 있는 정형시, 그것이 바로 시조라는 갈래의 정체성이다. 시조를 돌이 잘 놓여진 바둑판이라 한다면. 바둑돌 한점 한점에는 반드시 의미를 깔고 앉은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자리에서 목적 수행을 위하여 절제되게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수의 읽음으로 놓여진 돌의 긴장감과도 같이, 언제 바둑돌을 놓아도 새로움은 더할 것이다. 시조를 이루는 언어도 그렇듯 정려(精勵)된 놓임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최고의 정석(定石)은 기법(棋法)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법을 빨리 잊는데서 오는 것임을 시조의 영역에서도 인식하여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