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새책 또는 글 소개

장인수의 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

설정(일산) 2009. 12. 25. 22:20

<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 스토리문학 2010년 신년호

 

삶이란 하나하나 구색을 갖추어 가는 일이로구나

 

   장 인 수  

 

바닷가 달력

 

 임재춘

 

외포리 횟집 벽에는

바다달력이 걸려있다

껌뻑이는 형광등 아래 바람은 달력을 차고 논다

무쉬, 사리, 한객기, 대객기, 조금 들이

물높이 시간 옆에 날짜별로 가지런히 적혀있다

하루에 두 번씩

물결의 높이로 적혀있다

마음의 높이도 하루에 몇 번씩 바뀌는 걸

가장 높은 물결이 가슴 속까지 쳐들어와서

바닷가에서 출렁거리는 섬을 보다가

깊이 나락으로 빠졌는가, 했는데

밑바닥이 솟구치며 뭍으로 올라섰다

마주하고 선 빗줄기가

물결을 두드린다

철썩철썩 소리가 나게 맞고 있다

달력도 뒤집히며 날개를 퍼덕인다

서로 밀어내며 다투는 시간이

외포리 달력 위에 적힌 줄을 당겨

외로운 술이 채워지고 있는

사리중인 몸

 

(『정신과표현』2009년 11-12월호)

 

나는 종종 바다의 심장부가 궁금하다. 지구의 심장이 수평선 깊숙한 곳에 있지 않을까 궁금
하다. 1억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도 북한산도 설악산도 모두 동해 바다 속에
있었다고 한다. 조산 운동과 융기 운동 등으로 솟아 올랐다고 한다. 해변은 신비로운 장소
다. 바다와 뭍의 경계지점인 해변을 서성일 때 발등을 핥는 파도의 깊은 떨림을 본다. 아우
성은 바다의 심장이 펌프질하는 소리.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반복이 되며 해수면이
높았다가 낮아진다. 임재춘 시인은
가장 높은 물결이 가슴 속까지 쳐들어와서 마음의 높이
도 하루에 몇 번씩 바뀐다고 한다. 마음의 해발과 고도가 바뀌는 것도 모두 파도의 높낮이
때문이란다. 얼씨구! 나는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인간 뒤에 숨어서 수평선은 빛의
눈물을 해안에 흘리는 것이다. 철썩이는 바다에는 잠수함이나 고래가 토해내는 진동도 있
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핑글핑글 쏟아내는 어지러움이 있다. 북극의 빙산이 꿈틀거릴 때마
다 거대한 소리의 파동이 해류를 타고 전세계로 울려퍼진다. 달빛 홍수가 지상에 퍼부을 때
모래알은 힘을 모아 해변을 밀어올리고, 바다를 향해 야호! 함성을 내지르는 인간의 몸부림
도 바다 밑 어딘가를 떠도는 유령의 소리가 되어 파도를 미는 동력이 된다. 출렁이는 파도
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도 몸부림의 성분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저어서 간다

 

안차애

 

여름 해거름에 우포늪에 가면

얼굴의 팔 할이 부리인 저어새를 만난다

밥맛 쨍쨍하고 싱그러운 한 철에만 찾아오는 새

온 몸이 고봉밥 같이 하얀 새

전 세계에서 천 마리도 안 되는 희귀종, 천연기념물 205호라는 닉네임보다

박물관의 큰 숟가락만한 부리로 존재하는 Spoonbill

저어새는

밥이 하늘이고 종교임을 몸으로 먼저 아는 것이다

눈으로도 발톱으로도 속도로도

하늘인 밥을 구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

잔머리로도 힘으로도 눈속임으로도

종교인 밥을 빌어서는 안 되는 걸 안다

가장 근원적인 삶의 그릇, 정직하고 큼직한 부리로

물속을 ‘저어‘저어’한 생을 건너간다

노 저어서, 배 저어서, 밥 저어서..........

‘저어’서 반야언덕까지

‘저어’서 빛살둔덕까지

간다

가야한다

(『시산맥』2009하반기호)

 

새를 생각한다. 새는 허공의 심장에 ‘새’로운 피를 공급하기 때문에 ‘새’일까? 여기와 저기의 ‘사
이’를 건너다니기에 ‘새’일까? 두루미는 온 세상을 두루두루 쏘다니며 울음을 파종하기에 두루
미일까? 청둥오리는 둥둥 하늘을 맑게 치며 청둥이라는 울음의 근육을 지닌 족속이기에 청둥오
리일까? 습지의 제방을 길어길어 올리는 족속은 쇠기러기일까? 한 세상 길고 긴 하천을 저어저
어 건너가기에 저어새일까? 나는 종종 새떼의 힘줄이 궁금하다. 울음을 토하는 새떼의 목젖이
궁금하다. 얼굴의 팔 할이 부리인 Spoonbill! 우포늪을 입술 부리로 노저어가고, 하늘을 입술부
리로 노저어가고, ‘저어’서 반야언덕까지, ‘저어’서 빛살둔덕까지 가야하는 새! 구도와 순례의
새! 긴 부리로 세상을 핥고 빨고 노를 젓고 밥을 푸고 울음을 우는 저어새. 긴 부리에 비해 인간
의 입술을 얼마나 죄를 짓고 사는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의 입술은 저어새의 긴 부리에
비해 얼마나 비루한가.

 

소뿔

 

임영석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소처럼,

죽어라고 일해도 임금 한 푼 못 받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눈만 끔벅끔벅거리는 불법 체류자

강제출국 당할 때마다

그 피가 거꾸로 솟아

소뿔이 되어 간다

(시집 『고래발자국』에서)

 

임영석 시인이 『고래 발자국』이라는 시집을 냈다. 시를 짧게 쓰신다. 시가 깔끔하고 투명하고
명징하다. ‘빨간 돼지 저금통은 어디서 그런 인자한 웃음을 배웠는지 한 번도 찡그린 표정을 짓
지 않는다’(<언제나 웃는 돼지 저금통>에서) ‘까마귀가 떼로 날아와 있다는 것은 떼로 죽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아닌가’(<까마귀>에서) ‘마지막 지붕은 제 몸을 얹어 완성한다’(<참새>에서)
‘물길이 있으면 폭포요 물길이 없으면 절벽이다’(<절벽과 폭포>) ‘저 푸른 삶의 노동을 누가 가
르치는가. 평생 푸른 침을 등에 꽂고’(<소나무>) ‘이 모습을 수직으로 바로 세우면 낭떠러지 절
벽이다’(<타이어 자국>) ‘평생 쇳덩어리 이어붙이는 일은 잘 해왔어도 정작 제 몸 이어붙이는
일은 못했다’(<손님>) ‘배 가른 간고등어 꼭 껴안은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간고등어>) ‘시
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고래의 발자국을 보고 싶다’(<고래 발자국>) 등등 깊은 사유와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구절들이 재미를 더한다. 노동의 밑바닥 정서를 천진하고 순순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꾸밈없는 시, 천의무봉을 지향하는 시. 1부는 동물성을 지향하는 시들이고,
2부는 식물성을 지향하는 시들이다.

위 시를 읽으면서 두 가지 면에서 놀랬다. 첫째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소’라는 구절 때
문이다. 소는 그냥 가축이거나 정육점으로 직행하는 족속이 아닌가? 소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발상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는 모두 나름대로의 쓸모와
가치가 있다면 소, 말, 돼지조차도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발상이 맞겠다. 나를 놀라게 한 두 번
째 특징은 면은 ‘피가 거꾸로 솟아 소뿔이 되어 간다’는 구절이다. 커다란 두 눈망울 위 이마에
돋아난 뿔은 피가 거꾸로 솟아서 만들어진 것이란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뿔! 인간의 맨 얼
굴이 오히려 부끄럽구나.

 

구색은 없다

 

홍정순

 

—무협지 주인공이 씨부렁거렸다.

“이거, 대가리는 순전히 구색으로 달고 다니는군!”

채워도 채워도 끝없는 게 구색이지

구색의 일색은 남편

구색은 무지개, 구색은 비곗살

있으면 그만이지만 없으면 못 버티는,

아이 셋 낳은 여인의 똥배

오백 원 이문의 시멘트 한 포 배달 비용은 천 원

안 남아도 있어야 하고, 안 팔려도 있어야 하는,

천하일색의 눈웃음도 덤으로 건네야 하는 억지도 구색의 하나

각인각색—

구색이 없으면 물건도 못 팔지, 구색

갖추려면 밑도 끝도 없는 것

세상 진열대 다 뒤적거려도

팔색조들만 분주하게 날아오르네

 

(『현대시』11월호)

 

철물점은 ‘구색’이라는 용어와 가장 잘 어울린다. 구색(具色)은 색깔을 갖춘다는 말이다. 색깔을
빨강, 노랑 등의 한 두어 가지로 단조롭게 갖추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을 골고루 갖추어
놓는 것이 구색이다. 이러한 뜻의 말이, 그 의미가 확대되어 여러 가지 물건을 두루두루 갖추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갖춘다는 뜻은 아니고 거의 모든 종류에 걸쳐 골고루
갖춘다는 의미다. 구색은 좋은 것만을 갖춘다는 뜻은 아니다. 서점에서 서적의 ‘구색’을 갖추었
다고 한다면 정치, 경제, 예술, 과학, 사전, 동화책, 그림책, 단어장 등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의 모든 종류를 두루두루 비치해 놓았다는 뜻이 된다. 철물점이라는 힘든 직업에서 힘깨나 쓰는
남편을 구비한 것도 구색이고, 배 째고 아이 셋 낳은 여인의 똥배짱도 분명 구색이고, 선반에,
벽면에, 진열대에 가득 들어찬 온갖 공구와 물품도 구색임이 분명하다. 철물점은 철로 이루어진
온갖 잡동사니를 다 구비한 곳이다. 진열대에는 구색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구나. 물품 ‘천하일
색의 눈웃음도 덤으로 건네야 하는 억지도 구색의 하나’라는 구절에서는 무릎을 절로 칠 수밖에
없다. 절로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옳거니! 씨부렁거림도 구색이것다! 공사 현장에서 뼈대 굵은 각
인각색의 인간 군상들을 요리하려면 눈웃음도 구색이고, 억지도 구색이고, 비곗살도 구색이다.
삶이란 하나하나 구색을 갖추어 가는 일이로구나. 좋구나!

 

 

장인수

2003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