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시가 있는 에세이)
월간 에세이 9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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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에세이
그릇
지성찬(시인)
너무 크면 채울 수 없고
작고 보면 넘친다네
조금은 크더라도
넉넉함이 나으리라
깨끗한 그릇이라면
더 더욱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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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그릇
일상생활에서 그릇은 긴요한 물건이면서도 그 쓰임새의 편리함을 느끼지 못한다.
재질과 모양, 색상과 무늬 등에 있어 그 종류를 헤아리기 어렵다.
값진 그릇에서부터 헐값의 플라스틱, 토기제의 그릇에 이르기까지 그 계급의 격차 또한
헤아릴 수가 없다.
값진 그릇은 과연 무엇일까?
쓸 수 있는 그릇은 무엇일까?
어느 때 어느 그릇을 쓸 것인가?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은 재질과 모양이 훌륭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다.
깨끗한 그릇에 깨끗한 음식을 담을 수 있다. 재질과 모양이 훌륭한 그릇일지라도
불결하면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재질과 모양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잘 준비된 그릇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깨끗한 그릇보다는 값비싼 그릇에 눈길이 간다.
또한 그릇은 용도에 따라 그 크기가 적절해야 한다. 내용물보다 큰 그릇을 대하고 보면
민망스러울 때가 있다.
또한 작은 그릇에 넘치도록 많은 음식물을 담는 것을 보기도 한다. “적당”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릇은 항상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쓸 수 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보면 질박하지만
깨끗한 그릇도 많고, 좋은 그릇이지만 쓸 수 없는 오염된 그릇도 많이 볼 수 있다.
신문의 어지러운 사회면 정치면의 기사를 대할 때면 “깨끗한 그릇”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교육과 사회, 문화의 정책방향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쓸모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나의 그릇은 깨끗한 그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