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일산) 2010. 2. 4. 14:31

달만 살이 찐다




고철


겨울, 민박집에 누워 있다 사나흘 누워 있다

해도 저만치서 꽁꽁 누워 있다


반쯤 먹다 남은 커피가 얼어 있다

그림자 말고는 다 얼어 있어야 사는 곳


공책한개연필한개털신한개나무책상한개

잠바한개칫솔한개머플러한개담배한개나

한개,


몸 가누지 못하는 한 생애처럼

문풍지 사이로 겨울설악은 함부로 출렁거렸다

풍경에 적응하려하려는지 눈동자도 이리저리 굴려다녔다


산 속의 어둠은 지난 생의 한 철보다 먼저 잠든다

문득,

세파(世波)가 밀려오는 것인지

훅하고 눈바람이 지나간다


봄을 탐하는 건 사치다

달만 살이 쪄야 하는 고요,

여기 설악에선 그 고요도 얼어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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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보았다


   고 철



단추가 떨어졌다

분명히 명분이었던 한때의 것이 떨어졌다

견고했었다

헐거워도 풀리지 않았던

매달려야 비로소 숨을 쉬던 것

오늘 아침엔 별개가 되어 기어이 떨어졌다

너를 나이게 하던

안을 밖이게 하던 핏줄 같았던 매듭이 빛바랜 훈장처럼

오늘 아침에 떨어졌다


인천의 성냥공장이 있던 수도국산 송림동 마을

예외 없이 매주 수요일이면 재활용 분리수거를 한다

딱히 버릴 것도 아낄 것도 없는 거룩한 城 송림동

헤지고 헐거워진 옷을 버릴 땐, 단추란 단추는 모조리 뜯어서 모았다

알래스카의 백공의 발톱뿔까지 다 들어 있다

심지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벽화 속의 알 수 없는 동물의 사체 벼까지 다 들어 있다

뼈와 근육은 별도이지 않다


근육은 오늘을 살고

뼈는 한 생애를 더 사는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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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하나가 미워서


     고 철


 


지난 밤 그윽하게 취했을 때

친구가 해장하라며 주머니에 넣어 준

사과 하나


한 입 해장으로 사과의 반을 쪼개어 먹었다

사과 속의 씨앗가지 씹어 먹다가

그 작고 여린 씨방 속에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생각 하나가 형편없이 미워서


남은 반쪽은 텃밭에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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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정의




입 붙이고 나온 이상 모든 동물은 이빨을 가지지

질기게 싸워야 하는 명분

더러는 더운 피 하나 없이

숨통을 내줘야 하는 명분

그랴,

허튼 싸움은 부질이 없지


멱살을 찢어져야 본전이듯

세상은 늘 시비를 걸거든

하루의 세 끼를 거저 얻지는 못하는가 봐


미미한 일일세


내일 아침을 위한 싸움이라면

그건 순전히 업-사이드란 말일세

어플레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군


내일은

내일 싸우면 된단 말이지

오늘 이긴 자가


내일 아침 밥그릇이

충만하다고 보장은 어느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거든


그런 고로, 나는 오늘 충분히 엉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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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고 철


벼랑의 꽃 한 개가 위태하다


직박구리란 놈이

낭창한 가지 위에 간신히 다리 하나를 걸쳐놓고선

한 입 제대로 문다


저쪽 어느 이도 쳐다보는 것인지


벼랑의 꽃 한 개처럼

나도 새의 붉은 주둥이를 한없이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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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고 철



오늘 바다에 와서 바다가 놀다 갔다

바다에게 댓글을 달다가

집에 온 저녁에도 계속 뻘밭의 빈 소라가 슬금슬금

기어 다녀서 소라에게 족지를 보냈다


바다의 한 부분으로 살다가 노래의 한 부분으로 살다가

속의 내장을 꽃장처럼 다 내주고서야 비로소 전체의 바다가 될 수 있는

명분,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