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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숙의 소설 <봉쥬르 필립!>

설정(일산) 2010. 3. 5. 11:49

봉쥬르 필립!

 

   심 경 숙


감자 깎이로 무를 깎고 있다. 최대한 얇게 깎는다. 사르르 사르르 무를 깎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은밀하다. 무의 머리 부분이 요염한 여자의 눈자위처럼 파르스름하게 빛난다. 무를 나무 필통 만하게 자른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꽃을 조각한다. 사각의 무위에 장미꽃을 새긴다. 티스푼만하다. 조각도가 날렵하게 움직인다. 손을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중한다. 날카로운 칼날이 움직인 자리에 꽃이 한 송이 씩 만들어진다. 11송이의 장미가 피어났다. 말린 월계수 잎으로 장미 잎을 오려 붙인다. 손톱소제를 하는 작은 가위가 날렵하게 움직인다. 촛대위에다 정성스럽게 장미 조각을 꽂았다. 키가 제일 큰 장미꽃에다 와인색 아로마 오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린다. 희고 푸른 장미 속에 한 송이 흑장미가 피어나 고혹적이다. 동화 속에서는 마지막 12번째 초대받은 여신이 마법을 푸는 축복을 준다. 초대받지 못한 11번째 여신은 물레에 손을 찔리는 마법을 주었다. 무 껍질을 벗기듯 그녀의 울퉁불퉁한 여드름 자국도 깎아 무의 속살처럼 하얗게 되는 마법을 주고 싶다. 아니 그녀를 잠재우고 싶다. 손톱으로 박박 할퀴듯이 벨라 35호 그녀의 얼굴을 긁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한 내 삶의 찌든 때를 긁어내어 하얀 무의 속살같이 촉촉하고 아련하게 바꾸고 싶다. 그녀는 내가 갖지 못한 여러 가지를 가졌다. 그녀가 가진 것 중에서 그를 빼내고 싶다. 손톱을 다듬는 작은 칼로 꽃을 조각하고 잎을 조각하는 시간 엘리베이터가 머무는 통로 쪽으로 귀를 쫑긋거린다. 장미는 가시가 있다. 향기도 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 나는 꽃이다. 향기롭고 가시가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장미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나는 움직이며 말도 하고 사랑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기도 하는 꽃이다. 딩동 아! 엘리베이터가 2층에 머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가 오는 발작을 세고 있다. 그는 정확하게 23번의 발작 소리를 통통 튀기며 내게로 온다. 이제 그가 내릴 것이다. 그를 위해 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램프를 켰다. 실내는 푸른 보랏빛으로 비밀스럽다. 나는 그를 위해 감자를 간다. 그의 얼굴마사지를 하기 위해 감자를 갈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감자에는 햇볕에 탄 피부를 진정시켜주는 성분이 있다. 포로롱포로롱 새가 운다. 그가 왔다. 그는 곧장 이 방으로 올 것이다. 미사 피부 관리 숍 VIP실 이 곳은 내 소중한 직장이자 그와 내가 만나는 은밀한 곳이다. 내 등 뒤에서 그는 나를 안을 것이다. 그리고 귓불 가득히 뜨거운 입김을 불며 속삭일 것이다.

“사야” 

그가 부르는 목소리는 달콤하다. 그는 테너다. 듣기 좋은 톤이며 맑은 음색이다. 뒤에서 나를 안으며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는 입안에서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 맛이다. 나는 뒤에서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것을 좋아한다. 개나 고양이가 배를 보이는 것은 상대에게 자기를 맡기고 복종하는 뜻이라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뒤를 보이기 싫어한다. 등 뒤를 안겨 있는 동안은 등 뒤에서 오는 모든 바람을 그가 막고 있는 듯 아늑하다. 누군가 뒤통수를 칠 리도 없고 뒤에서 돌팔매질을 해도 그가 등으로 막아 줄 것이다. 그의 등은 넓고 튼튼하다. 그가 뒤에서 나를 안고 있다면 세찬 바람부는 낭떠러지에 서도 바람에 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지 않을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산꼭대기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은 좁고 음산했다. 집으로 오르는 계단은 언제나 가팔았다. 취객이 비틀거리며 전봇대에 오줌을 누기도 했고 변태가 수음을 하다 야한 소리를 하면서 달려들어 기겁을 하며 집으로 내달린 적도 있다. 뒤에서 오는 발작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가끔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 했다. 파리에서 코스메틱 과정을 배우던 때도 춥고 배가 고팠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지은 지 100년쯤 된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은 무서웠다. 지하철에 내리면 늘 그 시간에 흑인 남자가 눈을 번득거리며 이빨을 하얗게 내어 웃고 있다. 반드시 걸을 수가 없었다. 몸을 기울여 게가 옆으로 걷듯이 반쯤 몸을 틀어서 걸었다. 누가 따라와 덜미를 챌 것 같았다. 좁고 어둔 계단을 올라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글 때 까지 온 신경은 등 뒤로 집중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바람에 푸석거리며 떨어지는 날밤 낡은 민박집에서 그가 물었다. 내가 싫은가 왜 등을 돌리고 누워있느냐고, 나는 가물가물 나른한 잠 속에 빠져 들면서 대답했다. 등이 따뜻한 게 좋다고, 앞에서 오는 어려움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만 뒤에서 덮쳐오는 강추위는 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 등을 안겨 따뜻한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은 가슴 저릴 만큼의 설렘이 있고 볼이 화끈거릴 만큼 손길은 떨린다. 그가 부르는 목소리는 동화 속으로 가는 꿈을 꾸게 한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진녹색에서 갈색 녹물로 얼룩져 가던 오후, 차르륵 착착 50여명의 성장한 의장대들의 어깨위에 달린 계급장이 햇살에 번쩍거렸다. 그들은 마치 커다란 직사각형의 모형물이 움직이는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운동화에 황토 빛 흙먼지를 끼얹은 운동장은 뜨거운 열을 품어낸다. 학원제의 하이라이트로 금남의 구역에 한꺼번에 성장을 한 남자들이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희와 나는 그들이 벌이는 그 멋있는 동작들은 안중에 없었다. 우리는 지휘하는 대위의 목소리에 침을 삼켰다. 테너였다. 마치 호두까기 인형들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살아서 숨 쉬는 것은 지휘봉을 들고 구령하는 젊은 대위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시큼한 막걸리처럼 걸쭉한 영감의 목소리만 듣던 내가 처음으로 듣는 맑은 바람 같은 울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그 대위가 뒤로 앞으로 움직이며 50여명의 대원들을 절도 있게 지휘봉을 휘두르며 구령하는 것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타이타닉을 주연한 남자배우를 짝사랑하던 마음에서 30 분가량 그것도 잠깐 씩 구령이나 붙였던 대위의 목소리와 늘씬한 자태 때문에 짝사랑하게 되었노라 희는 고백했다. 희와 나는 언제나 바라보는 방향이 같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그런 사이다. 부대 근처로 산책가자고 희가 졸랐다. 하얀 양귀비가 탐스럽게 피어있는 뚝 길을 우리는 하얀 길이라 부르며 걸었다. 그 길을 지나면 군부대가 있다. 작은 비행기들이 여러 대 있었고 둥근 분수대에서 하얗게 물줄기를 뿜어대는 멋진 정원이 있다. 녹 빛 제복을 입은 까까머리들이 그들의 소중한 한 때를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젊음으로 꽉 차 있는 곳이다. 희의 몸에서 희미하게 라일락 향기가 났다. 나는 말이야 향수 중에서 라일락 향이 제일 좋아 코 밑에 돋는 솜털을 면도기로 밀면서 희가 중얼거렸다. 눈썹을 가늘게 밀고 립 라이너로 도톰한 입술을 선명하게 그려 한껏 멋을 부렸다. 분홍색 바탕에 검정색 라인을 한 장미가 촘촘히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구절초가 보랏빛 웃음을 웃고 있는 철조망 가에 서서 연병장 안을 드려다 보며 기웃거렸다. 가끔씩 위병소에서 우리를 불렀다.

학생들 누구 면회 왔어요? 저 요번 토요일 날 시간 있어요? 등등의 말을 들었지만 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맑고 깊은 테너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있었으니까. 오후 여섯시가 되어 국기를 내릴 즈음이면 트럼펫이 낫게 울렸다. 버짐나무 잎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토요일 오후 잔디밭위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여드름투성이 군인들의 친절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대위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볼 행운은 없었다. 가끔씩 신병들이 재식훈련을 받는 것을 볼 뿐이다. 군인 아파트 주차장에서 우리는 자전거를 탔다. 희는 자전거를 기우려야 겨우 올라 탈 수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놓고서도 나는 바로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자꾸 넘어졌다. 무릎이 까졌다.

“그렇게 해서는 자전거 못 타! 내가 잡아줄까?

까까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까까머리의 목소리도 테너였다. 그는 희가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도록 뒤를 잡아 주었다. 내가 가끔씩 밀어달라고 부탁하면 다리가 긴 너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희도 그도 웃었다. 아파트 주위를 한 바퀴 돌게 되자 희는 자전거 타는 것을 그만 두고 까까머리가 밀어주는 그네를 탔다. 나는 바람을 가르며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 언덕을 시원하게 내려 달렸다. 까까머리가 희를 바라보는 눈이 깊어졌다. 그들을 바라보면 가끔씩 가슴이 답답했다.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 같다. 하긴 여드름투성이에 키가 커서 뻣뻣하기만 한 나보다는 까무잡잡하지만 눈이 크고 웃으면 보조개가 귀여운 희가 훨씬 여자다워 보이니까. 목련이 화들짝 피어 있을 때다. 그 까까머리가 초대장을 내밀었다. 음대에서 매년 봄이면 여는 신춘음악회다. 그는 정말 테너였다. 그가 부르는 ‘사월의 노래’나 ‘여자의 마음’은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희는 그의 공연을 보고나서 그에게 더 열중했다. 희는 그를 따라 이태리 유학을 갔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날 이제부터 내 것을 빼앗기지 않아야지. 주먹을 꽉 움켜졌다. 라면 국물에 사래가 들려 눈물이 났다.


고객은 나를 신뢰할 때 부드러워진다. 고객이 긴장을 풀고 내게 자신의 몸을 안심하고 편안하게 맡긴 것을 느낄 때 내 손은 더욱 부드러워져서 춤을 추는 듯 가볍다. 처음 그의 얼굴에 클렌징크림을 바르자 긴장하고 굳었다. 스팀 타월로 자근자근 누르며 나는 낮게 속삭인다.

“긴장을 푸시고 편안하게, 주무셔도 됩니다.” 먼저 뜨거운 스팀 타월로 굳은 근육을 푼다. 감자를 곱게 갈아 차게 해서 그의 얼굴에 곱게 펴 바른다. 다시 온 얼굴을 마사지 하면서 나는 그의 머리맡에서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다른 손님들에게 들려주던 은근한 음악도 껐다. 아로마 향을 피운다. 아로마 향은 그를 안온하고 편히 쉬게 할 것이다. 그의 몸은 운동으로 잘 다져져 있지만 근육이 굳어 있었다. 나긋나긋 경락의 위치를 나열하며 효과를 말한다. 나는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지그시 누른다. 인당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압을 준다. 뒷목을 가볍게 주물러준다. 긴장이 풀려 혈액순환이 잘 되고 있는 듯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다시 관자노리를 누르고, 눈자위를 꼭꼭 누르고 어깨 근육을 풀고 등뼈 옆에 붙어 있는 근육을 하나하나 경락을 짚으며 부드럽게 마사지한다. 뒷골 어깨 순서대로 손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마사지한다. 엎드린 그에게 경추 옆 뭉친 근육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드디어 그가 낮은 탄성을 지른다. 내 손은 그의 허벅다리 안쪽 깊숙이 움직인다. 내 안에 있는 365개의 미세한 신경은 집중해서 서비스한다. 그가 침을 꿀컥 삼킨다. 나른한 행복감을 느끼는 듯했다. 드디어 그가 내게로 왔다. 나는 경락을 꼭꼭 꼭 잘 집는 선수다. 여덟 살 때이든가 영감이 주는 용돈 몇 푼에 영감의 어깨를 주물렀다. 영감은 말했다.

“어허 어허 시원타 어린 게 자네를 닮았나 보이 손맛이 제법 일세”

어머니가 곱지 않은 눈으로 영감을 쳐다봤다. 철이 들어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줄 때도 내 감각은 비상하게 경락을 잘 짚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바느질로 굳어진 어깨를 손으로 주물러 뭉친 근육을 풀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한다. 늙은 교수님은 말했다.

“자네의 마사지는 타고 났네 혈 자리를 아주 잘 찾아 아 시원하다. 그래 거기 그래 조금 더 세게”

파리에서 피부 관리를 배우고 돌아 와서 배를 복대로 칭칭 감고 경락공부를 힘들게 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의 영향이다.

“원장님 일주일에 한 번 더 서비스 받을 수 없나요? 요즘 바쁘다보니 너무 피곤해서,”

그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가끔 그와 교외로 나가서 듣는 음악이 행복하게 한다. 가끔씩 그가 테너로 불러주는 노래들은 감미롭고 달콤하다. 꽃지 에서 달을 보면서 찰랑이는 물결소리를 들은 것도 행복하다. 그날 그를 아주 내 남자로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벨라 35호가 김 선생을 저녁 식사에 초대 했다. 벨라 35호가 김 선생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면서 서비스 받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7층 스포츠센터에서 1시간 운동을 하고 내게로 온다.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추고 스물세 발짝을 세며 그를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면서도 행복하다. 나는 꽃을 조각한다. 향기 나는 장미를, 손톱을 관리하는 작은 가위나 끌 칼등은 섬세하고 예리하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살을 베이고 피가 난다. 조심조심 내 손은 섬세하고 날렵하게 움직인다. 그에게서 방금 샤워를 끝낸 촉촉한 물 냄새가 났다. 그는 라일락 향 샤워코롱을 쓴다. 그의 냄새가 좋다. 테니스나 골프를 좋아 하는 그의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시원한 감자 팩으로 또는 알로에로 안정시킨다. 그는 내가 해 주는 경락마사지를 즐긴다.

“사야 이번 학기에 평교에 강의 할 수 있게 했으니 준비해요”

사야, 나에게 사야하고 불러 준 두 번째 남자, 내가 두 번째로 갖고 싶은 나의 남자다.


오늘 트라비 분수에 다녀왔어.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었지. 네가 첫사랑을 만나 결혼에 골인하고 좋은 화가가 되기를 기도했어. 이곳으로 공부하러 와! 기다릴게 희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나는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고 산타루치아를 듣고 있다. 밖에서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댄다. 방문을 밀고 내다보았다. 대문이 없는 우리 집 삽짝 앞에 개들이 너덧 마리 짱아를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짖어댄다. 한꺼번에 짱아에게 덤벼들 기세다. 짧은 줄에 묶인 짱아가 코를 땅바닥에 비비며 흥분해서 서성댄다. 아하! 무늬가 풍기는 암내에 수캐 몇 마리리가 와있다. 무늬가 긴 줄을 끌고 삽짝 앞 수캐들 앞에 엉덩이를 흔들고 있다. 동네 개들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짱아가 무늬의 밧줄을 입으로 끌어당긴다.

빌어먹을 개새끼들 어디를 와서 누구 짝을 넘보냐?

내가 나가자 짱아의 기세가 더 등등하다. 이웃 개들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며칠 전 외삼촌이 무늬를 용달차에 싣고 왔다. 무늬는 걸어서 가자면 고개를 두개 넘는 지름길이 있고 도로로 돌아가려면 10킬로미터는 달려야 하는 이웃마을에 사는 외삼촌의 개다. 무늬가 암내를 풍기자 외삼촌은 짱아에게 씨앗을 받기 위해 데리고 왔다. 무늬는 짱아와 3일간의 짧은 연애를 하고 외삼촌의 용달차에 다시 실려 갔다. 어제 저녁 지친 몰골로 무늬가 고개를 두 개 넘어 짱아를 찾아왔다. 10미터 쯤 되는 긴 밧줄을 끌고 말이다. 외삼촌은 자주 집을 비우느라 무늬를 길게 묶어 놓고 있다. 가끔 담장을 넘어와서 꽃밭을 망치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서다. 외삼촌이 무늬를 데리러 올 때까지 짱아와 같이 묶어놓았었다. 무늬는 바람피우다 들킨 여편네 모양 풀죽어 다소곳이 배를 깐 채 반쯤 누워있고 짱아는 무늬 앞에 어깨를 좍 펴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모습으로 늠름하게 앉아있다. 10미터나 되는 그 굵은 밧줄을 입으로 끌어당겨 제 것을 지키려한 짱아가 대견해서 영감이 먹는 유정란과 우유를 짱아의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꼭 와 밀라노의 스칼라 좌에서 봇첼리 공연을 보여줄게 희의 편지 마지막을 읽으며 봇첼리 시디를 사러나갔다.


무늬는 포인터 잡종이다. 잡종이라도 그 몸이 늘씬해서 다른 어떤 순종보다 예쁜 암놈이다. 티브이 문학관에서 물무늬라는 잔잔한 아침 연속극을 방영한 적이 있다. 그 때도 그 이름이 좋았다. 짱아는 영감이 집을 보라고 갖다 준 수컷으로 아주 잘 생기고 용감한 진돌이다. 암내를 풍기고 들어온 똥개 따라 수캐가 왔다가 짱아가 물고 놓지 않는 바람에 한쪽 눈이 멀기도 했다. 영감은 그런 짱아가 대견한지 흠흠 거리며 짱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진돌이가 그 씨를 퍼뜨릴 때마다 강아지가 한 마리 씩 생겼다. 개 두 마리가 꼬리를 맛 대고 떨어지지 않는 쑥스러운 풍경을 가끔씩 보아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예쁜 강아지가 생길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여리고 순한 것들이 눈 도 채 뜨지 않은 채 우리 집으로 왔다. 영감은 어린 강아지를 보듬고 귀여워하는 행복감마저 빼앗아 갔다. 학교에 갔다 오면 키우던 강아지가 안보이기도 했다. 강아지가 여섯 달 쯤 지나면 보신탕 냄새가 온 집을 진동해 며칠 씩 밥을 굶었다. 언제나 집을 지키는 개는 짱아였다. 서서히 나는 짱아에게서나 다른 강아지에게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열어보던 편지함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나 영감이나 뚱뚱이 아줌마가 싫어져서 집을 나와 독립을 하게 된 것이 그때였을 거다. 사나운 짱아가 제 밥그릇에 다른 개가 코를 박아 먹고 있어도 딴청만 하는 것은 또 이상한 꼴이다. 무늬가 3일간의 짱아와의 사랑을 못 잊어 십리 길을 지쳐가며 긴 줄을 달고 달려 온 것도 희한하다. 무릇 제 것은 잘 지켜 내야한다. 영감이 흠흠 거리며 집에 들렀던 다음 날 그 여자가 집안에서 부리는 행패를 보면서 엄마는 왜 가만히 당하고 만 있을까 생각했다. 마당에 비싼 옷감 필이 동댕이쳐지는 가하면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뚱뚱한 그녀. 짱아를 보면서 그녀의 행패를 이해하기로 했다. 가끔은 귀한 음식들을 다라에 이고 와서 사나운 표정으로 주고 가던 그녀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다녀간 날 어머니는 염색을 했다. 멀쩡한 옷감들을 삶고 다시 염색을 했다. 치자를 깨서 진한 황금색 빛깔의 물을 들이거나 쪽물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마당에 새로 염색한 천들이 깃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다치지 않으셨어요?”

황토와 머드로 유명한 서해안 작은 섬마을을 다녀왔다. 여러 가지 짐이 좀 많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내 어깨를 부딪쳤다. 떨어뜨린 물건을 주웠다. 그도 엎드렸다. 테너였다. 엘리베이터가 머무는 층을 봤다. 7층 스포츠센터. 그 뒤 여러 번 건물 현관에서, 스포츠센터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다. 가벼운 목례가 있었다. 드디어 11번째 그와 만났을 때 나는 명함을 건넸다.

“피부 한 번 서비스 받으러 오세요.”

명함을 받자 그는 무심히 주머니에 넣었다. 새로 나온 피부 관리기를 검색하고 있었다. 정말 갖고 싶은 신품이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대출금 이자와 이번 달 집세나 직원들의 급료 등을 계산하며 금전 출납부를 뒤적이는데 거짓말 같이 그가 등록하러왔다. 다른 선생들과 스케줄을 바꿨다. 그의 등록서류를 보자 그가 벨라 35호와 한 집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벨라 35호는 우리 샵의 vip고객이다. 그녀의 멤버들은 10명쯤 된다. 처음 후배의 결혼식장에서 대학 선배로 그녀를 소개 받았을 때 그녀의 피부는 대학 1년 때의 내 모습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자를 깎듯이 한 층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역에서 발행하는 신문에서 그녀를 봤다. 대학을 홍보하는 티브이 프로에서 그녀를 본 기억도 났다. 명함을 건넸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속삭였다. 나처럼 고운 피부를 갖게 해주지. 그녀는 만족했고 그녀가 벨라들을 소개했다. 나의 벨라들은 여러 가지 좋은 소문들을 가져왔다.  소문들은 지방의 신문 사회 난 보다 훨씬 빨랐다. 누구네 딸이 결혼한다. 누구의 남편이 승진을 했다는 둥 그 중에서 벨라들의 남편들이 교수 임용이 된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학기 중에 가장 큰 화제다. 가끔 cctv를 보며 그들의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휴게실은 숍을 위해 좋은 정보제공 처다. 샤워 실이나 휴게실을 가장 고급으로 꾸몄다. 가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일이 하기 싫어지기도 한다. 그녀들은 젊은 피부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우렸다. 그녀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아끼는 것이 없다. 그녀들의 쳐지는 턱이나 입가의 주름을 없애기 위해, 없어지는 허리선을 세우기 위해 내 손은 그녀들의 배와 요추에서 땀을 흘렸다. 파리에서 배워온 새로운 건강법이나 기구를 사용한 피부 관리보다 경락을 따라 눌러주는 마사지를 그녀들은 즐겼다. 황토나 개펄에서 나는 진흙으로 마사지를 즐겼다.

“원장님 정말 시원해요 남자들은 원장님 손이 닿으면 정말 죽이겠어요”

그녀들은 아들이 면접을 보게 되었다고, 딸이 맞선을 본다고 여동생이 결혼 날을 잡았다고, 그녀들의 가족을 데리고 왔다. 그녀들을 위해 나는 가족실을 따로 마련했다. 젊은 남선생을 한 명 두었다. 근육이 단단하고 얼굴이 아주 잘 생긴 꽃미남이다. 가끔 그녀들은 김 선생에게 선물을 했고 식사초대를 했지만 모른 체 했다.


첫 미팅에서 내가 찍은 상대가 다른 사람의 손수건을 집었다. 내 파트너에게서 애프터 신청이 없었다. 키가 멀대 같이 크고 여드름이 온 얼굴에 곰보처럼 숭숭 난 나를 보고 좋아할 남자는 없다. 거울을 보다가 피부 마사지실에 등록을 하고 싶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피부 마사지 실을 기웃거렸지만 영감이나 엄마는 때가 되면 저절로 예뻐진단다. 일부러 돈 들여서 가꿀 필요는 없어 라고 말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오는 젊은 사모님들을 보면서 여드름이 온 얼굴을 덮고 있는 얼굴을 고치고 싶었다. 늙은 교수님의 타이핑이나 자료정리를 하고 가끔은 교수님의 출장길에 동행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피부 관리를 받게 되었다. 대학 3학년이 되자 여드름은 없어지고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쌍까풀이 아름다운 팔등신으로 메이퀸 후보에 올랐다. 퀸은 항운과를 다니는 후배의 몫이지만 학교에서 10%안에 들어가는 퀸카로 소문났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유명 출판사에서 편집기획을 맡게 되었다. 너무 바빠져서 교수님과는 만나지 않았다. 내가 기획한 젊은 작가의 책이 잘 팔렸다. 그 책이 영화를 찍어 대박이 나자 그는 잘나가는 작가가 되어있었다.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아 변두리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혼자 앓고 있었다. 따뜻한 죽을 끓여 먹였다. 그가 부상으로 받은 6개월짜리 유럽여행에 취재동행을 제의 받았다. 때맞추어 보내온 희의 편지는 사진 속에서 예쁜 계집아이를 안고 파마를 한 사내아이를 까까머리 테너 앞에 앉힌 채 행복하게 웃고 있다. 사진 밑에 수미의 백일 날을 기념해서 라고 쓰여 있다.

“결혼해서 신혼여행 와 베니스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돌아오는 길에 여행사에 들렀다.

 

메트로폴리탄 지하철은 붐볐고 지저분했다. 알바시간에 맞추느라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오르다가 발목을 삐어 한 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달콤한 테너가 다가왔다.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그는 친절하게 내 가방을 들고 지하철에서 10 분 거리인 직장까지 부축해서 동행했다. 푸른 눈에 금발이 아름다운 테너를 가진 남자, 필립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사야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준 사람도 필립이다. 내가 직장이나 학원에서 성실한 동양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필립 덕분이다. 한국에서 온 편지에 순자라는 스펠을 보고 자야라는 끝 자만 부른 필립이나 프랑스에서 날아온 편지 때문에 사야라고 불러 준 그나 내가 사랑한 남자들이다. 종일 종종 거리며 걷고 서서 금발머리들의 마사지를 하느라 퉁퉁 부은 발을 발가락 하나하나 뜨거운 물에서 자근자근 누르며 필립은 속삭였다.

“사람도 기계와 같아 함부로 쓰면 망가져. 사야는 발을 너무 혹사시켜 힘들면 말해 도와줄게 내게 기대”

필립에게서 나는 버터 냄새가 싫다. 된장국이 그립다. 


아로마 오일 램프의 노란 불이 휴게실 안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날마다 창문을 열어 새로 공기를 갈고 청소기로 꼼꼼하게 청소했지만 쑥이나 다른 약초 타는 냄새가 커튼이나  벽에 스미어 찌들었는지 비릿하고 싸한 냄새가 난다. 내부수리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야 그런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그 조교 앞에서 마누라한테 무릎 꿇고 비냐?”

“세상에 못 믿을 게 남자라고, 어떻게 얻은 학장 자리인데 그걸 내 놓겠냐?”

“설마 비겁한 남자들이 조강지처 버리고 가지고 있던 기득권 다 내놓고 젊은 여자 따라 살겠냐? 결국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

벨라들이 수군거린다. 벨라22호 남편이 젊은 조교와 바람을 피우다 현장에서 들켰단다. 벨라22호는 남편의 카드가 근교의 펜션에서 사용 확인이 되자 득달같이 달려갔다. 두 사람은 와인 잔을 들고 막 러브 샷을 하던 중이었다. 벨라22호는 와인 병을 던졌고 조교는 이마에 피가 났다. 그 남편이 그 조교를 사랑하니 놓아 달라고 했고 벨라22호는 사정없이 남편의 뺨을 갈겼단다. 벨라22호의 남편은 이마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는 조교를 남겨놓고 벨라22호를 따라 도시로 돌아왔다. 윈즈 공이 연상의 이혼녀와의 사랑을 위해 왕 폐하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존경스럽다. 다른 벨라들은 벨라22호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고 즐기는 듯하다. 작년에 벨라 22호의 남편은 50대 초반에 학장 취임을 했다. 신학기가 되기 전에 그들 부부는 마추픽추 꼭대기에서 꼭 껴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벨라들 중 22호 네 부부가 부부동행 여행을 제일 많이 한 다고 입들을 삐죽인 것이 두 달 전일이다. 35호가 내 존재를 안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슬며시 궁금한 생각이 든다. 내가 쓰는 라일락 향수를 그녀는 알아낼 수 있을까. 정말 그를 가지고 싶다. 그의 우람하고 듬직한 가슴이나 맑고 정겨운 테너 목소리 그리고 은은한 라일락 향기. 쥬리가 그에게 안겨 솜사탕을 먹고 있다. 쥬리도 그도 행복하게 웃고 있다. 파리에서 함께 살기를 간청하는 필립을 뿌리치고 서울로 돌아 온 것은 굴을 넣어서 끓인 미역국이 먹고 싶어서였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등을 지지며 땀을 흠뻑 흘려보고 싶었다. 두부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인 청국장이 그리웠다. 희와 까까머리 테너가족이 다정하게 웃는 사진을 보는 날이면 벽을 보고 한국말로 욕을 했다. 아는 욕을 할 수 있는데 까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비를 벌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나를 위해 필립은 운전을 했고 저녁이면 뜨거운 타월로 온 몸을 마사지 했다. 필립의 손길은 따뜻했다. 컴퓨터에다 그날그날 내가 배운 과제를 타이핑해 저장해 준 것도 필립이다. 미용 쇼가 열리는 곳이면 짜증내지 않고 먼 거리를 운전하고 가방을 들어 데려다준 것도 필립이다. 필립이 정리해준 자료가 곧 책으로 나온다. 내게는 훌륭한 재산 목록 속에 속한다. 계단을 몇 개씩 올라야 했던 낡고 불편한 하숙집이 아니라 잔디가 깔린 정원의 안락함이 2년여 계속되자 파리생활은 한국이 그리웠다. 필립이 끓여주는 스프를 숟가락도 대지 않고 개수대에 붓는 일이 잦았다. 쌀을 사다 맨밥을 해 먹기도 했다. 가끔씩 구역질이 나왔고 매콤한 김치나 냄새나는 청국장이 먹고 싶었다. 자격증이 나와 가방을 챙기자 공항으로 데려다 주며 필립은 말한다.

“언제고 오고 싶을 때 돌아와 기다릴게”

다음 학기에 강의하려면 교제를 잘 챙겨봐야 한다. 컴퓨터를 열자 필립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야” 필립이 속삭이며 손을 내민다. 쥬리가 필립의 등에 올라타고 말놀이를 한다

“사야 사야”

메트로폴리탄 지하철역의 많은 계단이 어지럽다. 그가 속삭이며 뒤에서 안는다. 따스하다. 강변 둔치에서 그와 쥬리와 내가 웃으며 걷고 있다. 쥬리의 금발이 햇살에 빛난다. 벨라 35호가 차갑게 노려본다. 어지럽다. 종아리가 뻣뻣하고 굳어있다. 따뜻한 물에다 발을 담근다. 필립의 손길이 그립다. 창이 열려있는지 등이 시리다. 문을 닫으려고 일어나다 기우뚱하고 균형을 잃었다. 물을 쏟았다. 쥬리가 찰박찰박 손바닥으로 물장난을 친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빠빠하고 종알거리며 두 손을 흔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그립다. 방바닥 흥건히 쏟아진 물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난다. 짱아가 우람한 가슴을 곧추세워 앉아 늠름하게 앉아있다. 고추가 탱탱하다. 무늬가 짱아 앞에서 행복한 듯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무늬와 짱아사이에 태어난 잡종 강아지가 고물고물 눈을 감은 채 어미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사랑스럽다. 뚱뚱이 아줌마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비온 마당에서 드잡이한다. 빨랫줄 가득히 염색한 천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벨라35호의 앙칼진 눈이 탐색하는 듯이 노려본다. 벨라들이 휴게실에 모여 수군거린다. 쥬리를 보며 손가락질한다. 그와 함께 했던 꽃지 에서의 달빛이 그립다. 밤새 찰랑이며 물결치던 물소리도 그립다. 희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지금 불행해 네 위로가 필요해. 까까머리 테너가 노랑머리 피아니스트와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봉쥬르 필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