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석의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유종인
(4월호-미래를 개척하는 시인)
사물은 모두 말하는 입이다
-유종인 시인
임영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만들어진다. 그 만큼 사람의 삶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때로는 그 삶의 깊이가 전통이 되고 관습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러나 요즘 산업의 발달은 전통과 관습과 역사라는 사실을 각인시킬 만큼 깊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삶의 방법만 바꾸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과거에는 모두 수공예로 물건을 만들다보니 장인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문화재란 제도까지 두고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산업사회는 다량의 물건을 동시에 제공도 하지만, 그 물건들이 망가지고 부서지면 환경을 파괴하는 폐기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 모든 물건들이 시인의 눈에는 말을 하는 입이고 눈이고 귀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본다. 생태적 환경만큼 사람의 삶의 본능을 지켜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종인 시인의 시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물들이 말을 하는 입으로 우리 삶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저수지에 빠진 의자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유종인 시집 『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에서
유종인 시인의 의자를 읽다보면 참으로 많은 사실들을 발견한다. 낡고 다리가 부러진 의자가 저수지 물속에 빠져 있지만, 그 의자는 누군가의 등을 따뜻하게 기대어 준 소중한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버림을 받는다. 사람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살며 베푼 만큼 갚는다는 情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정을 사람은 사물들에게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유종인 시인의 가슴에서는 사람들이 버린 정을 따듯하게 보듬고 있다. “물속에서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바로 버림받은 사물이 사람의 가슴을 억누르는 말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버림받은 의자를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마음은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 등을 기대어 앉기 시작했다 /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 서서 흐르고 있었다”고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깊은 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마음이라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입을 가진 것만 말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입이 없는 사물이라고 해서 그 사물의 입이 닫혀있다면 사람이 사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삶에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물들은 그 사용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또한 그 목적을 다한 후에 버려지지만, 버려진 사물들에게까지 마음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 시인의 마음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 친구가 되어야 하고, 마음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미루나무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곶아 쓰고자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유종인 시집 『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에서
미루나무에서 보여주는 유종인 시인의 필력의 힘은 대단하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미루나무가 자라서 죽고, 죽은 후 다시 아궁이 속에서 흰 연기를 내며 사라지는 순간까지 말의 힘은 탄탄하게 유지되고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기록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인연으로 사람 삶과 맺어져 있다. 미루나무가 한 생을 살다가는 모습이 사람의 생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함에 있어 화선지에 써 놓은 글과 같다는 생각이 미루나무가 지닌 말의 힘이다.
시인에게 말은 천금(天金)이다. 한 번 내 뱉으면 다시 주어 담지 못하는 것이 말이다. 사물이 지닌 느낌을 이해하고, 사물에 대하여 말을 할 때에는 사물이 지닌 장단점을 모두 알아야 한다. 유종인 시인이 미루나무에서 보여준 말들은 미루나무도 하나의 붓과 같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땅이 붓을 쥔 손이고, 허공은 화선지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자기만의 필법을 완성하기까지 갖는 노력은 수십 년은 되어야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필법을 다 익히지 못해 죽은 미루나무에게서도 또 다른 필법이 몸에 농익어 있어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고 말한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오랜 시간 미루나무를 바라보고 그 미루나무와 일심동체로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미루나무의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깊이는 일심동체를 이루는 데서 찾아야 한다. 마음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의 깊이 또한 흔들리지 않는다. 낮은 개울물 소리가 크다는 말은 깊이가 낮기 때문이다. 깊은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수양은 필수고, 깨달음은 그 수양의 목적이 되어야 남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수양의 근본은 좋은 시를 읽고 깨달음을 얻어야만 깊고 낮음을 분간할 마음의 여백이 생긴다. 유종인 시인의 미루나무와 같은 시는 허튼 마음을 바로 잡는데 필요한 말의 힘이 담겨 있는 시라 하겠다.
탑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들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유종인 시집 『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에서
사물이 갖는 힘은 무엇인가? 사람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칼, 도마, 수저, 신발, 옷, 의자, 책상, 연필, 밥그릇, 우산, 바늘 등등을 가져야 살림살이가 유지된다. 한 가정의 살림살이가 이 정도면, 마을, 도시,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유종인 시인은 상가 골목에 쌓여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보고 탑이라 생각하고 있다. 쌓여져 높이 솟아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탑이라는 인식이다. 탑은 사람이 염원을 빌고자 쌓는 건축물이다. 그 탑의 꼭대기 의자는 “사람들을 포기해온 의자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고 한다.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가 꼭대기의 의자고, 그 의자는 늘 비워 놓는다. 하느님은 왜 꼭대기 의자에 사람들을 앉혀 놓기를 포기했을까? 아마도 그 꼭대기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가장 신성시 하여야 할 사람이라는 것일 것이다. 때문에 그 꼭대기 의자는 사람마다 각자가 가장 신성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앉을 것이란 기대를 남겨 놓고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유종인 시인의 시에서 사물은 모두 입을 가진 것들과 동일시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우리들 삶과 동일하게 사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맥락과 통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닌 의미는 사람이 살아 온 역사와 함께 발달하고 바뀌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기 때문에 만들어 쓰였던 사물들은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이다. 지나간 역사를 직접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남긴 모든 것들은 사람의 입과 같은 존재로 남는다.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일 만큼 소중한 일은 없다. 사물은 그 소중한 삶을 지켜가고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사물은 그래서 모두 입을 지닌 사람의 삶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사물은 사람에게 사람보다 더 오랜 시간 동무였고, 스승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소중함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종인 시인의 시집 『 교우록 』, 《문학과지성사 》에서는 참된 친구가 들려주는 진실한 마음을 전해주는 듯, 사물의 소리가 우리들 삶에 얼마나 많은 진실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유종인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 문예중앙 』에 시 「화문석」외 9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과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 아껴 먹는 슬픔 』,『 교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