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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보의 시(용접공 외 5편)와 이재복 평론가의 시평

설정(일산) 2010. 5. 6. 15:42

용접공 외 5편

 

강경보

 

저 쭈글쭈글한 사내

얼굴에 몇 숲의 바람이 살고

한세월 지나온 손가락 마디마디

겸손의 날들 둥글게 서 있는

저 사내 휘어질 듯

잠시 숨 놓은 자전거나 오토바이 사이

해체된 페달의 관절을 툭툭 치며

걸어온다, 아직

혼곤함이 가시지 않은 작업장 한켠

옛 동료처럼 던져진 고물덩어리들

서늘한 초저녁 잠들어 있고

팅팅 불은 자장면 한 그릇 냄새 피우며

오늘도 누군가의 빈속 채우지 못하는 날

몸 비틀어 하품 하는 사내

용접봉을 들고 마지막

가스불 당긴다

 

타타탁!

 

생의 가뭄이 일이에 터지고

속을 뒤집어 펼칠수록 불꽃으로 산란하는

쇠의 내장들, 온몸으로 받아먹는

저 사내

 

 

 

첫눈

 

당신이 내려오신다

잘 살아라, 마지막 한마디

더 이상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눈빛만 그윽했던 새벽

사랑해라 사랑이 아니라면

내 여기까지 못왔다는 말 한 마디

어미는 어디 있느냐고 말 한 마디

여기 있어요 하며 손잡아 주는

며느리의 손등을 쓸며

입 끝에서 중얼거리던 말 한 마디

삶이 미처 준비되지 않고

죽음이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오는 새벽

당신 아내 손잡으며 큰 맘 먹고

정말 숨 한번 크게 쉬어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말 한 마디

신세 많이 졌네 잘 있게

그 캄캄하고 추웠던 말 한마디

 

펄펄 내려오신다

따뜻하게 풀어져서 내려오신다

 

 

 

 

 

우주물고기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번 쓱 감았다 Em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올라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도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가시여뀌 사랑법

 

 

솜털같이 촘촘한 가시들이 사실은 꽃이었다네

꽃같이 붉은 횃불머리가 사실은 열매였다네

숲 해설사 선생님 이 대목에서 갑자기 톤이 높아지네

저, 생의 오묘함을 설명하려는 해설사의 기묘한 자세바꿈

꿀벌이나 나비가 찾지 못할 아주 작은 가시꽃을 달고

한숨 푹푹 내쉬었을 가시여뀌 상상을 해보라 하네

좁쌀만한 횃불머리 열매에 공갈 꽃화장을 하고

촌 먼지 길 나서는 발 없는 여인을 보라 하네

온 힘으로 온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지구 한 귀퉁이

돋보기로 봐야만 보이는 가시꽃들을 보다가

숲 해설사 선생님 문득 말문을 닫네

아득함이 숲 사이 햇살로 떨어져 잠깐 그의 안경을 스쳐가는데

아마 앳되고 어린 시절 그가 보낸 추파가

아직 소식조차 없다는 것이 생각났던 게지

 

 

 

 

 

 

 

새의 지도

 

 

저 창밖의 새는

어떻게 세상을 다 알지

저 작은 눈으로

어떻게 하늘의 길을 보며

저 작은 날개로

어떻게 바람의 중심을 타지

아이에게 직선으로 묻지 않는

나의 왜곡을 힐난하듯

아이의 대답이 직선으로 날아온다

그건 말이예요

새의 머리에 지도가 있어서 그래요

사람의 머리에는

뇌가 들어 있는데요

새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지 않기로 한다

물질과 정신을 비유하는

나와 새가 함께 살아가는

저녁의 밥상에서

다리 고쳐 앉는다

 

 

 

월미도는 항구다

 

 

항구는 항구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없으니 항구다

 

영시零時의 대전역이 없으니 더더욱 항구다

 

김포공항이 없으니 틀림없는 항구다

 

그런데 이별이 보이지 않는다

 

이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항구가 아니다

 

내륙에 남아서 내륙 바깥으로 밀어내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항구가 아니다

 

항구가 아닌 항구다

 

문득 한 사내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다

 

떠나가는 배 떠나고

 

슬픔은 누군가의 가슴에 매장되어 있다

 

 

 

강경보 1965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고, 200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아 2010년 처녀시집 『 우주물고기 』, 《종려나무 》 시집을 출간함

 

152-761 서울시 구로구 구로1동 주공아파트 107동 201호

 

(010-9064-3735)

 

 

 

 

 

 

 

 

 

 

 

 

 

 

 

 

 

 

 

 

우주 혹은 관계로서의 몸과 말

 

이재복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자연의 말과 몸의 소리

강경보의 시에는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은 관계의 심원함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까지를 포괄할 때 관계의 심원함이 드러난다.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는 우주적인 관계의 심원함을 이야기할 수 없다. 우주의 심원함을 눈으로 감각하고 인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눈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고 인식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주적인 관계의 심원함을 느끼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까지를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문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우리는 몸으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을 망각하기에 이른다. 몸이 점점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눈 혹은 시각의 비대함이 채우게 된 것이다.

몸의 망각과 시각의 비대함은 곧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몸은 기본적으로 생식기능을 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의 몸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과 자연과의 교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우주와의 관계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몸 안에 자연이 혹은 우주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주의 기가 몸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기도 하고 또 나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존재 자체를 생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과 자연 혹은 우주와의 교감이 인간의 문명화된 테크놀로지로 대체되면서 기와 같은 자연적인 것은 점점 소멸하기에 이른다. 인공화된 자연이 자연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관계의 지형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딜레마를 제공한다. 자연과 인공화된 자연이 모두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코(자연)와 디지털(인공 혹은 문명)에 대한 통합적인 사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이 자연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시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자연의 회복이 인공화된 자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연의 회복을 견지하는 시적 사유가 지금 여기의 힘의 실체인 문명화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정치성을 망각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불안하지만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적 사유 역시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회복에 대한 시인의 시적 사유의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가 바로 「우포늪통신」이다. 시인은

저 왕버들 뿌리를 만져본 적 있니?

일억년도 넘은 우포늪이 말을 다 한다는데

말이 샘물처럼 고여서 이제는 아예

제 몸이 말이라고 그냥 그런 줄 알라고

그때부터 마음의 생각들 어린 물풀로 올린다는데

왕버들 뿌리 끝에는 이동통신기지국이 있어서

어젯밤부터 물젖은 전파를 내 가슴에 쏘고 있다

마름풀 가느다란 줄기가 팽팽하게 진동하면

나는 겨드랑이 어디쯤서 추억의 소리 듣는데

가려움은 피돌기를 따라 발끝까지 흐르는구나

그래 알겠다,

가시연 생이가래 개구리밥처럼 나도 한 때는

수생의 푸른 꿈 꾸었는지 몰라

구로동 종각을 오가며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왕버들 뿌리 같은 어머니에게서 뻗어 나와

공기주머니 허파를 숨쉬며 전송하노니,

아직은 잘 살고 있습니다 몸에서는 가끔

자각자각自覺自覺 무심무심無心無心

물소리도 나고요

- 「우포늪통신」 전문 인용.

 

라고 노래한다. 시인이 자연의 한 표상으로 삼은 대상은 ‘우포늪’이다. 우포늪이 이렇게 자연의 한 표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억년도 넘는 시간 동안 생성을 거듭해온 왕버들 뿌리’ 때문이다. 시인은 이 ‘왕버들 뿌리’와 ‘어머니’를 등가로 놓는다. 이 사실은 자신이 왕버들 뿌리로부터 뻗어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왕버들 뿌리로부터 뻗어 나온 것은 시인 자신만이 아니다. 온갖 자연의 생명체들이 여기에서 뻗어 나왔으며,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을 이루면서 교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과 왕버들 뿌리와의 교감은 ‘추억의 소리’가 말해주듯이 점점 약화되기에 이른다. 시인은 왕버들 뿌리가 있는 우포늪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문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세계의 소음에 함몰되어 있는 경우 ‘왕버들 뿌리 끝의 이동통신기지국’에서 쏘는 전파를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그 전파를 통한 자연과의 교감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자연과의 분리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왕버들 뿌리 끝의 이동통신기지국에서 쏘는 전파를 감지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시인은 ‘자각자각自覺自覺 무심무심無心無心’으로 답한다. 이것은 시인의 몸에서 나는 소리이다. 시인이 몸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때 전파를 감지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은 무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각과 무심에 이르러 시인이 듣는 것은 몸에서 나는 물소리이다. 물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곧 자연의 소리를 감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몸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속성을 회복함으로써 자신이 추억의 소리쯤으로 알고 있던 왕버들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전파를 생생하게 감지하기에 이른다. 왕버들 뿌리로 표상되는 우포늪의 전파란 곧 자연의 말이다. 우포늪(자연)의 말은 우포늪의 몸의 소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포늪에서는 말과 몸이 하나이다. 가장 이상적인 몸의 말 혹은 몸의 언어가 우포늪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우포늪과 시인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기위해서는 시인의 몸이 자연이 되어야 한다. 자연인 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말인 것이다. 시인이 우포늪 왕버들 뿌리가 내는 물젖은 전파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몸이 자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연은 거대한 관계의 총체이다.

 

2. 사랑 혹은 자연의 무성함과 무심함

시인은 늘 자연이고 싶어 한다. 자연 속에 하나의 자연으로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온전히 자연의 개체이면서 전체인 그런 존재에 대한 시적 사유를 빈번하게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나무에 대한 사유는 각별하다. 이미 우포늪 왕버들 뿌리에서 그 일단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처럼 시인에게 나무는 가장 닮고 싶은 자연의 표상이다. 시인은

 

저 나무들처럼,

나도 쇄골 아래쯤에 번지番地 하나 새기고 싶다

가렵고 향내나는 물관부 땅에 접붙이고

몸을 밀고 올라오는 어둠들이 아득하여 잠시 쉴 때

수천의 빛으로 가닥져 흔들리는

문패 하나 가슴에 달고 싶다

죽음조차 눈부셔서 잊을 수 없는 사람에게

고사목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을

주소도 일러주고

빈 둥지에 새들이 곧 돌아올 것처럼

그쯤에는 그늘도 무성하게 늘어뜨린

플라타너스 푸른 집이 되고 싶다

- 「봄의 장례식장」 부분 인용.

 

고 고백한다. 시인이 나무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성함’이다. 무성함이라는 말 속에는 텅 비어 있음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어떤 것에 집착도 없고 또 자성(自性)이 무자성(無自性)일 때 무성함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성함의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여기에는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무성하게 그늘을 늘어뜨린 플라타너스’가 표상하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나무의 그늘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생성과 소멸, 눈에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까지를 포함하는 그런 복합적인 세계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타너스의 무성함이란 기실 자연의 그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시인은 나무의 무성함 속에서 자연을 본 것이다.

나무의 무성함은 무심함과도 통하는 것이다. 늘 일희일비하고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에게 나무의 무성함과 무심함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도저한 경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성 밖에 있는 열등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무성하고 무심하게 보이는 자연을 자신의 임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대상화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자연이 무성하고 무심한 것은 열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크고 깊은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인간은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차원이 전부라고 착각한 채 불안을 그림자처럼 드리운 상태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무성하고 무심한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자연이 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문제는 자연 혹은 우주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에 그 교감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무성함과 무심함을 이해하는 일은 교감에 대한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동반한다. 자연과의 교감이 시인의 몸을 자연이 되게 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이 말은 몸이 가지는 복잡성을 거두절미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느낌이나 감각의 차원뿐만 아니라 마음이라는 차원을 또한 포함한다. 시인은 몸이 지니는 이러한 관계를

 

사랑은 에너지가 아니지?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지? 마음에 있는 거지?

마음은 사람 몸에 있지?

- 「화두話頭」부분 인용.

 

로 규정한다. ‘사랑은 마음에 있고, 마음은 몸에 있다’는 시인의 규정을 놓고 보면 마음은 몸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몸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성이나 영성의 차원까지를 포괄하는 것도 모두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아무리 테크놀로지가 발달하여 고도의 문명화된 세계가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해명할 수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논리도 따지고 보면 마음의 그 변화무쌍하고 심오하며 쉽게 개념화하거나 의미화 할 수 없는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래의 과학은 그 마음까지를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층에 드러난 감각이나 느낌의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마음의 저 깊고 넓은 세계를 과학은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미래 세계에서의 다음과 같은 회의는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 「우주물고기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부분 인용.

 

우리가 상상한 미래가 현실이 되는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하’는 미래 세계에서도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런 마음이 배제된다면 진정한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다. 시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의 말은 한 번의 눈빛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생각을 통한 마음의 아득한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만 그 마음은 사랑 이외의 다양한 영역을 포함한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을 거느리고 있는 마음도 몸 안에 있다. 사랑보다 큰 것이 마음이고 마음보다 큰 것이 몸이다. 흔히 몸과 마음을 대등하게 놓고 이야기하지만 시인은 몸 안에 마음을 놓는다. 몸과 마음은 대등하게 놓일 수 없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마음은 늘 몸에 나타나며(「슬픔의 행방」), 몸 밖에 있는 마음(「화두話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마음과 몸을 대등하게 놓는 것은 몸을 하나의 물질이나 육체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절대 물질이나 육체로만 규정할 수 없다. 몸은 정신이나 마음 혹은 감성이나 이성 그리고 영성까지 포괄하는 존재와 생성의 총체인 것이다. 가령 시인이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몸이 따라 가지 못한다는 것은 지옥이다’(「눈에 밟힌다는 말」)라고 할 때도 여기에서의 몸은 물질이나 육체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몸을 동반하지 않는 마음은 있을 수도 없으며,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그것은 몸을 유령이나 허깨비로 인식한 것에 다름 아니다. 몸을 초월할 수 없는 마음의 끝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마음이 죽음을 맞아도 몸은 죽지 않는다. 몸은 다시 자연 혹은 우주의 관계를 통해 더 큰 몸속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몸이 있기에 우주의 무한한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우주적인 관계의 회복과 전망

우주의 무한한 관계는 다른 그 어떤 존재도 아닌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해체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몸을 가진 존재 중에서 인간만이 그 몸을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거나 승순(承順)하지 않고 자신의 임의대로 몸을 조작하고 만들어 무한한 우주의 관계의 고리를 끊어놓고 있다. 파괴되고 해체된 몸을 회복하고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적인 관계 속에서의 몸의 의미에 대해 비판과 반성적인 사유가 있어야 한다. 결국 인간의 몸을 통한 비판과 반성이 전제되어야만 그 관계를 회복하고 복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통한 비판과 반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주적인 관계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우리는 ‘사랑은 마음에 있고, 마음은 몸에 있다’는 시인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의 문맥대로라면 우주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단초는 사랑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에게 사랑은 마음과 몸의 핵이면서 우주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인자이다 우주적인 관계에도 잡음이 끼어들 수 있고, 이것이 관계 자체를 파괴하거나 해체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일방통행적인 것도 또 과도한 욕구나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개체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차원에서의 사랑을 말한다. 존재하는 각자 각자가 동일성이 아닌 비동일성의 차원에 놓일 때 진정한 사랑 혹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 시인의 입장이다. 우주적인 관계로서의 사랑은 마치 생명처럼 각자 각자의 차이와 자유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시간을 관통하는 그대와 나의 오래된 사랑에도

 

그대의 속을 긁어낸 맑은 허공과

 

어둠뿐인 내 굳은 나무뿌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 「시간의 비밀」 부분 인용.

 

시인은 사랑 역시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오랜 시간을 견딘 사랑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시인의 오랜 사랑에는 ‘속을 긁어낸 맑은 허공’과 ‘어둠뿐인 굳은 나무뿌리’가 공존한다. 맑음과 어둠, 비어 있음과 충만함, 수평과 수직이 공존하는 세계가 사랑이라면 이것은 서로 반대되거나 대립되는 세계가 일치하는 역설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사랑을 한 치의 틈이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완전하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틈이 있는 불완전한 것이며, 이 틈이 사랑을 더 사랑답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속을 긁어낸 맑은 허공’과 ‘어둠뿐인 굳은 나무뿌리’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가 공존하는 이 역설 속에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란 기실 자연이나 우주의 섭리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이나 우주의 관계 역시 역설의 구도를 지닌다. 우주의 관계 섭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개 '역논리(逆論理)'와 '비논리(非論理)'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반대일치의 논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는 서로 상치하고 대립하는 비동일성에서 그것을 융화하고 아우르는 동일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의 세계에서는 시와 비, 자와 타, 미와 추가 회감 융통한다. 시인의 사랑은 우주적인 관계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역논리든 아니면 비논리든 우주적인 관계의 맥락에서의 사랑은 인연과 연기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어느 특정한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관계하는 모든 존재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그냥, 쳐다본 일밖에 없다

 

동박새 아침 저녁으로 날고

 

눈썹날에 팔랑이는 바람 말고는

 

눈짓 한 번 준 일 없다

 

내 눈 밖에서

 

일생의 고요를 살던 동백꽃

 

내 한 번의 사랑을 받은 죄로

 

오늘,

 

순간에 저물다

- 「순간에 저물다」 전문 인용.

 

에서처럼 시인과 동백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이 동백과 나눈 사랑은 ‘눈썹날에 팔랑이는 바람 같은 눈짓 한 번 준일’ 밖에 없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일로 인해 동백은 ‘순간에 저물고’ 만 것이다. 전혀 자신과는 무관해 보이던 동백이 기실은 가장 큰 운명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시인의 말은 우주적인 관계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알의 좁쌀이나 씨앗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는 사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어쩌면 이것이 우주적인 관계 혹은 우주적인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 운명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관계의 심원함이 내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다.

시인의 몸이 자연의 몸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가는 것도 나무의 무성함과 무심함을 닮으려는 것도 모두가 우주적인 관계에 승순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주적인 관계에 대한 사유로부터 잉태된 시는 상상과 표현의 차원에서 심원함을 획득할 수 있다. 이때의 심원함이란 전적으로 어떤 초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적인 관계라는 말이 드러내는 무한성으로 인해 그것을 초월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적인 관계 혹은 우주적인 사랑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유와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차원에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우주적인 관계로서의 몸과 말의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사유를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조 한 알이나 감나무의 감 하나를 통해 우주의 관계를 사유하든 아니면 우주의 관계 속에서 조 한일이나 감나무의 감 하나를 사유하든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도 또 존재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우주적인 관계에 대한 사유, 이를 통한 우주적인 관계로서의 말과 몸의 은폐된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 앞으로 시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할 화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