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인
조선의 여인*
지 성 찬
조선의 여인들은 순종과 인내로 살아온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조선의 남자들은 여인 보다 우위에 서서 살아온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옛부터 남성 중심으로 사회가 발전하여 왔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조선의 여인들은 그 소임이 막중하여 중노동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마치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처럼 대접을 받아왔다. 필자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고초를 감내하면서 살다
가셨다.
충북 중원구 신이면에서 박만복, 황을림씨의 맏딸로 태어나 20세에 출가하여 여섯 남매를 두고 가셨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삶을 살다 가셨다. 42년을 살다 가신 어머니 보다 20년을 더 살았으니 아쉬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여섯 남매를 거두시는 일이 어려운 살림에 쉬울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늘어서서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며 사셔야 했으니
옷이며 먹 거리등 문제가 쉽지 않았다. 한복을 일일이 손바느질로 지어야 했고 간장 된장을 해마다 만들고
많은 양의 김장도 빼놓을 수 없는 큰 행사중의 하나였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많은 배추와 무로 김장을 준비해야 했고 어린것들을 일일이 챙겨야 했으니 한시도 쉴 틈이 없으셨다.
해보지 않은 일도 매우 잘 하실 만큼 손재주가 있으셨다. 우리 형제들의 솜씨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일찍이 주님을 만나서 주님께 의지하며 한동안 사시다가 세파에 못 이겨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하셨지만 끝내는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하늘나라로 인도하셨음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학에 입학해서는 좋은 구두도 사주시고 좋은 옷도 맞춰주신 어머니의 고마운 마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나이 22살에 어머니를 여윈 나로서는 절망감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고 오랜 동안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들도 많은 고생을 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어머니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를 가장 좋을 곳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니 이것이 기적이요 믿음의 증거이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재주 있는 많은 손자 손녀를 보며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해 본다.
어머니에 대하여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항시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가신지 40여 년이 흘렀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쏟아진다.
어릴 적 나는 봄이면 안성천 건너에 있는 도그머리 뒷산에서 진달래를 꺾어와 집에다 꽂아놓는 것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 때 그 진달래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모른다.
안성천 맑은 물에 뛰노는 피라미 송사리들은 나의 꿈이었으며 지금도 그 물고기의 모습들이 새롭게
가슴에서 뛰어논다.
안성천이 흐르는 안성시 신흥동 207-4 번지의 추억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 진달래꽃은 가슴속에서
아프게 피고 또 진다.
자식
대보름 엄마 같은 달, 쥐불로 당긴 밤아
그 밤을 곱게 말라, 한 뜸 한 뜸 피를 찍던
재처럼 삭은 젖줄이 불씨처럼 살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