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일산) 2009. 8. 25. 17:11

굴 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이 이시는 <시하늘>2003년 가을호에 수록된 시로 어디선가 한번 들었지 싶은 음담패설 즉 와이담이다.시인도 이 시를 발표하면서 제목 옆에 이렇게 설명을 붙여 놓았다 "항간의 음담인데 얼마 전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차마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라고. . . 음담패설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바로 오탁번 시인이다. 음담에 묻어 있는 삶의 곡진함까지 한눈에 통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오탁번 시인은 지금 고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이 시로 2002년 미당 문학상 후보로 까지 올랐었다. 오탁번은 소설가로도 잘 알려진 참 대단한 입담을 가진 분이다. 자칫 잘못 들으면 그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릴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엮어낼 수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미당의 시를 읽다가 보면 웃다가 결국은 울고 마는 상식을 초월해 버리는 역설을 자주대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질마재 신화'의 "상가수(上歌手)의 노래"에서 미당은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 삼아 염발질(머리 다듬기)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가수의 노랫가락이 하늘의 달과 별까지 잘 비치는 그 똥오줌 거울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너스레를 떤다. 결국 이승을 넘어 저승까지 넘나들었다던 상가수의 노랫가락은 똥오줌 항아리의 더러움을 초월해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 파격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오탁번의 '굴비'도 이런 단순한 음담을 훌쩍 뛰어 넘은 파격을 지니고 있다. 사내와 계집의 사랑을 묘사하는 두 구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와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에는 개똥벌레, 베짱이, 소쩍새 등 온 자연과 우주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내와 계집의 사랑과 함께 호흡하고 장단을 맞추는 미적인 승화의 경지가 숨어 있다 음담패설에서 우주의 합창을 엮어내는 그런 파격이 이 시의 깊은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