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새책 또는 글 소개

이성목의 이제 꽃피면 안되겠다

설정(일산) 2009. 8. 28. 19:44

이제 꽃피면 안되겠다

 

    이 성 목

 

 

소파가 꽃을 피우려는지 인조 가죽이 여러 갈래로 튼다. 갈라진 틈새로 노란 스펀지가 올라온다.

 

의자는 몇 해 전에 이미 꽃을 피웠다. 굵고 탄력 있는 스프링 꽃대가 아직도 등받이 근처 등뼈처럼 구부정하다.

 

아버지는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암은 어느 꽃의 구근이었는지 뿌리를 뽑아내자 한 순간 몸 속 가득 꽃을 피웠다. 나는 마른 꽃대처럼 남겨졌다.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수명을 다한 형광등에 푸른 멍을 보았다. 곰팡이 가득한 천장이 보였다. 떠나고 남는 것이 모두 꽃의 혼령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안되겠다 꽃이 피면 안되겠다.

 

아버지 기일 오기 전에 소파를 고쳐야겠다. 형광등을 갈고, 바닥이며 천장도 손을 봐야겠다.

 

 

 

 

 

다우너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소가죽인데도 뒤축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 갈 시간이 없다.

 

 

 

 

*------------------------------

이성목

1962년 경북선산 출생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주겠다>,<뜨거운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