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새책 또는 글 소개

손남주의 들불 외 1편

설정(일산) 2009. 8. 28. 19:50

들불

 

손 남 주

 

 

누가 던진 불씨인지 모르지만

지난 겨울, 들불은

밭둑을 태우고 논둑을 태우고

데모대처럼 들길을 행진했다.

산불로 크게 번질까 두려우면서도

덩달아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서서 바라보던

젊은 대열의 함성 같던 그 불길,

 

마른 풀섶과 잔디를 태우고

구불구불 열차처럼 불길이 지나간 들판,

이 봄에 다시

그 시커멓고 휑한 자리에 혼자 서 본다.

모든 게 다 타죽어버린 새카만 재 밑으로

봄 햇살을 한껏 빨아들이고

아, 파란 쑥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어

불길만큼이나 푸른 함성을 질러대고 있다.

 

..................................................................

木蓮

 

손 남 주

 

 

치켜든 추녀 끝으로

저 수많은 붓끝들이 하늘 향해

무슨 말 또박또박, 아니

일필휘지(一筆揮之)하려는가,

 

부드러운 화선지에 뚝뚝

먹물 번져, 새 봄이 움틀 듯한데

문득 외마디 피리 소리 비끼더니

아, 추녀 끝으로 일제히 학이 날아 오른다

 

자주 끝동 흰 치마 치렁하게

댓돌을 내려서며 바라보는

女人의 하늘에 아스라이 봄의 미소가 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