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비밀스런 시창작노트 릴레이(시조부문 5회)
그리운 호곡장(好哭場)
서 숙 희
“유난히 드센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해 휘고 구부러져 자라난 키 작은 나무는 고통의 눈물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았다. 오름,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있기에 중산간 들녘의 생명력은 더욱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것이다.”
제주섬의 중산간 들녘을 필름에 담는 일에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친 사진작가 김영갑의 말이다.
그렇다. 한반도의 저 남쪽 끝 망망대해 위에 동그마니 솟은 섬, 몇 마디 수식어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뜨겁고 처연하고 사무치는 섬, 제주! 거기 제주에는 한라의 능선을 맨몸으로 휘달려 온 바람이 있고, 제주도를 가장 ‘제주도적’이게 하는 삼백 예순 여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그 오름은 섬사람들이 고통의 눈물 속에서도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어머니이다. 오름은 화산 폭발로 생긴 기생화산이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름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희로애락의 애환이 서린 삶 그 자체이며 종내는 돌아가 살과 뼈를 묻을 곳이다.
제주의 시인들과 함께 두어 번 오름을 오른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름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육지 사람들이 이른바 등산을 할 때, 그저 운동을 위한, 혹은 산을 즐기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제의를 치르는 듯한 어떤 엄숙함과 비의(悲意)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오름은 제주에서 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산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의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뜨겁게 안아온 오름. 제주의 비극과 고통, 화인처럼 남은 선연한 상흔, 사무치는 그리움과 황홀한 슬픔, 그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안은 오름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슬프고 외로울 때, 참아온 가슴속 응어리가 서러움에 복받칠 때 찾는 오름. 거기서 맞는 바람에서 꺾이고 꺾여도 일어서는 원시적 생명의 힘을 느꼈으리라. 거기서 내려다보는 검푸른 바다에서 소리치는 제주의 힘을 보았으리라. 그렇듯 오름은 제주사람들에게 언제고 달려가 안길 수 있는 크고 너른 어머니의 품이자 끈질긴 생명력의 근원지로서 자리하고 있으리라.
제작년 늦은 가을, 억새가 한창인 따라비오름에 올랐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억새의 일렁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람이 내리달리고 치닫는 대로 수많은 억새는 일제히 몸서리치며 황급히 길을 내주고 있었다. 억새의 일렁임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크게 용트림을 하듯 굽이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불을 물고 하늘로 치솟듯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뿐이랴. 몇 개의 굼부리를 타고 오른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들녘과 산, 바다는 잊고 있었던 막막한 그리움같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거대한 눈물의 바다로 출렁일 것만 같은 느낌.
거기, 오름에서 문득 일찍이 연암 박지원이 중국 요동벌을 두고 한 말,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렸다.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만하구나!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사람이란 본디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알게 해주는 곳. 300년 전의 연암이 지금 다시 살아나서 따라비오름에 오른다면 틀림없이 다시 한번 그 유명한 호곡장을 들먹였으리라.
연암의 그 호방한 ‘울음觀’. 슬픔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으니 복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웃음과 같다는 말.
그랬다. 제주 땅 따라비오름, 그곳에서는 슬픔과 분노, 서러움과 환희, 갈망과 사무침, 그 모든 감정을 울음이라는 새로운 힘으로 토해내고 싶은 곳이다.
시퍼런 수평선 발끝에 걸치고서
뜨거운 불의 말을 가슴에 품은 그 섬
함묵의 등뼈로 엎드린 겨울 오름에 오르면
가파르게 옭아 쥔 한 올 끈이 풀리고
부리지 못한 삶의 통증도 가벼이 하역되니
갇혔던 내 울음의 집이 바람처럼 헐린다
스스로 제 울음을 묻고 일어서는 통곡
싱싱한 슬픔의 뼈 하얗게 방목되는
그리운, 그 섬의 겨울오름 사무치는 호곡장
(졸시 「그리운 호곡장」전문)
다시 김영갑은 말한다.
“탐욕에 물들어 진짜 소중함을 분별하지 못하고 빈껍데기에 쉽사리 유혹당하는 사람들이 어찌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랴. 그대들이 봤다고 우기는, 겉으로 드러난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이나 제법 풍만해 보이는 볼륨도 사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도한 오름이, 광활한 들녘이, 한번 보고 휑하니 지나치는 이들에게 제 속살을 쉽게 내보일 리 만무하다. 그러하니, 중산간을 봤다고, 오름을 안다고 얘기하지 말라. 그대가 안개를 아느냐, 비를 아느냐, 구름을 보았느냐, 바람을 느꼈느냐, 그러니 침묵하라. 중산간 들녘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 씨 뿌리고 거두며 마지막엔 뼈를 묻는 토박이들뿐이다.”
그저 두어 번 오름에 오른 자, 그야말로 일별하듯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인 내가 어찌 감히 제주 오름의 그 진짜 울음을 듣고 만질 수 있으리요. 다만 그저 경외하는 마음일 뿐. 한 편의 졸시가 좋은 울음터를 오히려 어지럽힌다는 것을 나, 충분히 알고 있느니.
서숙희
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상북도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시집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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