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무색무취(無色無臭)를 담아내는 시인
-도종환 시인
임영석
그릇은 음식을 담기 전에 무색무취를 먼저 담아낼 수 있을 때, 진정한 그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릇에 향기가 있거나 색이 담겨 있다면, 그 그릇은 모양 좋고 맛있는 음식을 담아낼 수 없다. 시란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현실 속에는 과거라는 맛과 미래라는 맛, 꿈과 희망, 슬픔, 기쁨, 사랑 등등의 수많은 맛이 있다. 시인은 그 현실의 맛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실을 그릇에 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무색무취로 비워낼 수 있어야한다.
필자는 도종환 시인을 가리켜 세상의 현실을 담아내기 이전에 마음의 무색무취를 담아낸 시인이라 말하고 싶다. 도종환 시인하면 「접시꽃 당신 」이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시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시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가 대중적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진곡(賑穀)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무색무취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다.
도종환 시인을 대중적 시인으로 불리게 한 『 접시꽃 당신 』과 『해인으로 가는 길 』, 두 시집을 통해 어떤 변화의 마음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1986〉
「접시꽃 당신」이란 시는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도종환 시인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로서,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간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기도문 같은 시다. 모든 사람에게 삶은 간절하고 절실한 공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사(生死)의 이별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 이별 앞에 마지막 기도는 눈물로 밖에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종환 시인은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라는 기도로 떠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놓아 주고 있다. 삶이라는 그릇에 담긴 마음을 죽음이라는 그릇에 옮겨 놓으며 그 마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라 하겠다.
해인(海印)으로 가는 길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엇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느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해인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지친 육신을 바랑 옆에 내려놓고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지금은 바닥이 다 드러난 물줄기처럼 삭막해져 있지만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도종환 시집 『해인(海印)으로 가는 길』〈문학동네,2006〉
전자의 시 「접시꽃 당신 」이 우리 곁을 떠난 사람을 노래하는 마음이었다면, 「해인으로 가는 길」은 스스로 화엄에 이르는 마음을 담아 놓고 있다. 해인(海印)은 부처의 지혜로 우주 만물을 깨달아 가는 일을 말한다. 그 깨달음이 바다에 깃든 만상의 물빛과 같은 것이니, 우리 삶이 바다에 비추어진 만상의 그림자처럼 험난하지만 해인으로 가는 길은 무색무취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이를 수 있는 마음이다. 우리 삶은 무색무취다. 무색무취의 삶은 자연과 동화되고 세상과 일치하는 마음을 가질 때 얻을 수 있다. 그런 세상을 찾아가려고 도종환 시인은 "화엄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고 말한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자아의 거울이다.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은 나를 비워내는 일에서 출발한다. 삶이라는 에너지는 밖으로 분출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우리 눈과 마음에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느껴야 보이는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스스로 느껴야 담기는 무색무취의 삶의 시를 쓰고 있다. 시라는 것은 결국 마음으로 보고 느낀 무색무취의 삶을 담아내는 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종환 시인
충북 청주 출생
시집으로 『고두미마을에서 』, 『접시꽃 당신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사람의 마을에 꽃이 핀다』, 『해인으로 가는 길 』, 산문집으로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 『모과 』,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 동화 『바다유리 』, 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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