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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 이우종 선생님의 시조

설정(일산) 2009. 10. 6. 12:04

 유동 이우종 선생님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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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國의 소리

 

          유동 이 우 종


퉁기면 열 두 가락 목을 빼면 鶴의 춤이

일렁이는 여울물에 한동안 쫓기다가

가난한 동구 밖에서 물이 드는 도라지꽃


곱게사 여민 靑瓷 물살 환히 밝아 오고

다홍 고추 동동 띄워 고향의 맛 빚어 낼 땐

우러러 하늘을 보면 果汁으로 끈끈했다


日月을 오르내린 꽃사슴의 발자국이

神話 저 편에서 무서리로 덮이는 밤

옷고름 다시 조이는 춘향이의 기침소리





사랑 I


세월이 허물어져 창살 위에 쌓이는 밤

갈잎만 딩굴어도 백번은 울었는데

내 사랑 그대를 위해 만번인들 못 울랴.

                   (84. 12. 5)


사랑 II


살아서 숨쉴 때만 손목을 잡아 주고

피어서 있을 때만 꽃이라고 부르지만

사랑은 무덤에서도 타오르는 불길인 거.

                   (96. 8. 19)



千年을 해와 함께 지켜 온 침묵인데

엮어 온 꿈이 있어 안으로 부푼 生命

뽀얗게 주름져 오는 황홀했던 나날들


피나게 고요한 밤 별을 바라 섰노라면

四月의 이야기가 놀처럼 번져간다

또 하나 아쉬운 꿈을 孕胎하는 괴로움


아! 新羅적 해와 달은 못내 도는 제 자린데…

겹겹이 멍든 사연 헤어 보는 이 아침엔

原形의 푸른 하늘을 머리 위에 여 본다


註 <四月의 이야기>는 <四․一九革命>을 뜻함




白雪의 章


살아온 눈물만큼 세월이 번지는데

꽃뱀이 되리라는 順伊의 머리 위로

하늘이 마구 무너져 지천으로 쌓인다.


시들한 이 마을엔 故鄕같은 꽃이 없어

잉 잉 울어 예는 눈송이를 헤노라면

먼 날의 이야기들이 시리도록 젖어 온다



별과 달을 엮다가도 임이여! 겨운 情에

뒹굴며 떨어지는 얼얼한 하늘조각

鐘路에 눈이 내리면 발자국이 찍힌다



꽁초와 나


지금은 턱을 괴고 들창가에 누웠지만

돌밭을 일궈내는 쟁기날로 서 있다가

잘 익은 과원 둘레를 달리기도 했었다.


눈 뜨면 사라져도 눈 감으면 다가오는

그 많은 발걸음의 길고 긴 그림자를

불러도 들리지 않을 가슴으로 불렀다.


해질 녘 종로에서 담뱃불을 댕기다가

얼비친 쇼윈도에 내 얼굴을 찾다 보면

아 나는 너무도 빨리 태워 버린 꽁초였다.

                         (94. 7. 19)


꽃과의 동행(同行)


저 고운 꽃잎들도 흔들리며 피는 거다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며 피었나니

꽃 피는 언덕에 올라 흔들리며 사는 거다.


그 많은 꽃잎들도 젖으면서 지는 거다

빗물이 배는 대로 젖으면서 떨구나니

꽃 지는 그늘 뒤에서 젖으면서 가는 거다.

                            (96. 6. 25)


서울의 담


터 한번 잡으려고 허구한 날 기웃대다

바람의 무게만큼 내려앉은 그 어깨로

저 높은 서울의 담을 용케도 버텨왔다.


새를 뽑고 있는 아내를 달래가며

오늘이야 설마 하고 구두 끈을 매던 날에

여섯 자 담장 높이가 일곱 자로 치솟았다.

                      (94. 8. 7)


삭은 이빨


신들린 서울 바람 한낮에도 이가 시려

막걸리 한 잔으로 한참을 버티다가

어차피 삭은 이빨을 울 너머로 빼 던졌다.

                       (94. 8. 20)



밤의 서정(抒情) I


파도가 밀려오는 밀려와 부서지는

저만큼 밀려와도 심지 끝에 불이 붙는

동짓달 뜨거운 밤이 허리띠를 푼다네


눈썹에서 노닐다가 앙가슴에 뛰놀다가

물보라 피어나는 진구렁에 빠지다가

지그시 눈을 감으면 천(千)의 현(絃)이 떤다네

                      (80. 1. 25)


사랑 찾기


글쎄다 새벽부터 꺾어 든 꽃다발을

줄이거나 어쩔이거나 망설이고 있는 것은

시들지 않는 선물을 안겨 주고 싶어서다


시들지 않는 꽃은 없다는 걸 어찌하랴

변치 않는 그 사랑이 남원쯤엔 있다기에

콧등에 돋보기 걸고 찾아가는 중이다.

                     (96. 8. 19)


자술서(自述書)


지하철 출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꼭 잡고 흔든 손이 아직도 따스한데

그 쉬운 이름 석 자를 물어보지 못했다.


신발이 맞질 않아 부르튼 발을 끌고

커피잔 둘레에서 방황하던 하루 끝이

촛불에 사위어 가도 나는 울지 못했다.


지그시 눈 감으면 섣달에도 꽃이 벌어

맨발로 달려가던 양지 바른 고향으로

편지를 써 놓고서도 띄우지를 못했다.

                  (92. 4. 7)


자술서(自述書)


빗장을 걸어 놓고 한나절을 절구다가

누군가 자박이며 다가오는 그 소리에

가슴이 열리면서도 문은 열지 못했다.


북한산 나비 떼가 철 맞아 짝지을 때

한 번은 울어야 할 몸살 난 꽃송이가

어깨를 흔들어대도 차마 꺾질 못했다.


꽃물이 옷깃으로 스며드는 사람끼리

서로의 여울목에 발목을 잠그면서

밤 새워 다리를 놓고도 건너지는 못했다.

                      (92. 4. 8)


동 전


세상은 팽그르르 동전으로 돌아가고

그 동전 둘레에서 나도 따라 돌다 보면

겹겹이 세월이 잠겨 목을 죄고 있었다.

                    (92. 7. 13)


나 는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해를 산다기로

벽 위에 기어가는 자벌레와 같은 거냐

나 지금 기어다니는 벌레와도 같은 거냐.


한 둬 번 흔들다가 훌훌 털고 가는 거다

저만큼 굴러가는 가랑잎과 같은 거다

나 정말 사라져가는 나뭇잎과 같은 거냐.

                     (97. 8. 9)


친 구


퇴근길 종로에선 등을 살짝 두드리고

서울역 근처에선 이야기도 나눴지만

차 한잔 나눌 친구가 어디 그리 흔턴가

                     (88.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