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나의 시론

약한 것이 강한 것이다-2002년 시조세계 겨울호에 대하여

설정(일산) 2009. 12. 5. 17:12

약한 것이 강한 것이다

 

-2002년 시조세계 겨울호에 대하여

 

지 성 찬

 

원고청탁을 받고서 시조세계에 게재된 작품에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날 것인가에 대하여 마음 한 구석에는 의문점이 있었다.하지만 게재된 작품을 면밀히 읽은 후에 느낀 소감은 창간하여 9호를 발간한 시조세계가 연륜 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 어느 때 보다 풍성한 작품을 대할 수 있었는데

작품중에서 필자의 눈에 확연히 잡히는 내용은 시의 소재가 “약한 것” 이었으며 표현은 “낮은 어조였다”.

자기의 주장과 의지가 독자에게 강하게 전달되기 위하여는 통상 “강한 어조”의 표현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를 뒤집는 표현의 원리에 근거한 수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툭’ 소리 하나로

해탈하는 알밤

한 해 동안의 집착에서

떨어지고 있다

가만히 놓아버린면

저렇게 자유로운데

 

문밖을 그대로

나서면 되지만

작은 것들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내 안에 내가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전원범 시인의 “해탈”의 전문)

 

위의 전원범 시인의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 “알밤”은 아주 작은 것으로서

나무에서 이탈하여 나무와 그 인연을 끊는 것인데,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에는 온 몸을 가시로 감싼 상태였으나 나무로부터 이탈하여 껍질을 깨고 새로운 알몸으로 태어나는 모습에 실존적 자아를 투영하였다.

시적표현에서 통상 범하기 쉬운 오류가 설명적표현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알밤의 상황설정과 그 분위기를 통하여 자아를 인식한 표현방법이었다.

 

종이 한 장 잡아당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칼날도 아니요

억새 잎도 아닌데

 

저렇게

허약한 것도

칼날이 되는구나.

 

(전원범 시인의 “칼날이 되는구나” 의 전문)

 

위의 시는 전원범 시인의 “칼날이 되는구나” 이다.

약한 종이가 가만이 놓아두었을 때는 아주 평온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힘이 없어 보였으나 찢으려고 힘을 가했을 때, 손에 상처를 주는 칼날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약한 듯이 보였던 것이 강한 모습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급부와 반대급부, 또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환기시키기도 하며, 세상의 모든 진리를 함축하여 표현된 내용으로 보여진다.

이 시를 읽으면서 머리칼이 위로 뻣뻣이 솟는 듯한 서늘한 충격을 받았다.

이 시의 종장에서 반전효과를 극대화하여 시적표현에 성공하고 있어서

시조의 모범답안으로 추천하고 싶다.

 

한 해의 번다함을

잎으로 다 벗어버리고

 

마른 하늘 가지 끝에

점안해 둔 홍시 몇 개

 

전생의 인연들처럼

다시 붉어 오누나.

 

(전원범 시인의 “감”의 전문)

 

위의 전원범의 시에서 “잎” 과 “홍시”는 표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잎이 떨어진 후에 남은 것은 홍시 몇 개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바뀌는 계절을 따라 수 많은 잎이 필연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세상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이승의 많은 번뇌와 인연과 노력들도 결국은 몇 개의 홍시라는 결실로

남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 가을에 나의 감나무에는 과연 몇 개의 감이 열릴 것인지 말이다. 이 몇 개의 감이 암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전원범 시인이 발견한 것은 작은 것, 약한 것을 통해서 실존적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작고 약한 것이지만 이 보다 더 큰 웅변은 없을 것이다.

 

전원범 시인의 경우와 같이 작고 약한 것을 표현한 김일연 시인은 또 다른 분위기의 작품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가장 빛나는 별은

사막에 뜨는 것을

 

내 광막한 사막일 때

한 없이 눈부시던 너

 

쓸쓸한 오아시스에

들꽃처럼

깃들어있네.

 

(김일연 시인의 “사랑 5” 의 전문)

 

김일연 시인은 “별”에서 “들꽃” 으로 이어지는 변환장치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두 개의 단어가 다 같이 작고(별) 약한 것이나(들꽃) 그것들이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삶이라고 여겨진다.

“가장 빛나는 별은 사막에 뜨는 것을” 은 이 시의 열쇠이며 결론이기도 하다. “사막” 과 “오아시스”, “별” 과 “들꽃”, 으로 연결되어진 완벽한 문장의 구조가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읍성 움츠린 석양에 나 홀로 들던 날

낡은 풍경 호야나무 눈꽃 세상 피워낼 때

성지의 바람 한 채여, 성체의 집 한 채여

 

용서를 구하려는 자 신앙심이 부족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자 믿음의 눈물 없나니

그 누가 희망의 성서 다시 읽어주겠느냐

 

사내들 생의 파문이 진 시간과 시간의 사이

함께 동행한 순교자 비로소 해인에 들고

남은 자 고백성사는 끝내 들을 수 없으리라.

 

너는 어떻게 사는가 그 산다는 것의 물음에

침묵은 그런 것일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오래된 마음의 감옥 새 한 마리 찾아왔다.

 

(오종문 시인의 “겨울 해미읍성”의 전문)

 

오종문 시인의 “겨울 해미읍성”은 종전의 작품 경향에서 많이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표현보다는 내용에 무게를 둔 것과

실존적 자아를 보다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보다 성숙한 시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누가 희망의 성서 다시 읽어주겠느냐” “오래된 마음의 감옥 새 한 마리

찾아왔다“ 는 표현은 독자의 마음을 열기에 충분한 울림이라고 본다.

감옥에 찾아온 작은 새 한 마리. 사람은 그런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에 갈증을 풀어줄 샘물과 같은 사랑은 사막에 뜨는 영원한신기루 같은 것일 것이다.

젊은 시인들에게 이 작품이 하나의 나침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바람소리에 잠을 깬다 바퀴벌레까지 바스락

마당으로 나와 고개 드니 눈사람 닮은 보름달

난곡동 깊은 시름이 달을 갉아 먹는다.

 

난곡동 다시 밤이 오고 구멍가게 평상 위에서

밥그릇에 술 마신 초봄의 얼굴들아

이제 막 굴뚝 빠져 나온 연기가 하늘로 오른다.

 

(박현덕 시인의 “1999, 난곡동에서 보낸 하루” 중에서 첫째, 셋째수)

 

박현덕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바퀴벌레” “보름달” 도 역시 작고 보잘 것 없는 소재인데 이런 평범하고도 낡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낸 솜씨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깊은 시름이 달을 갉아 먹는다” 는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의 표현은 시적표현이 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위의 작품에서 시조의 가락을 놓치고 있음을 박 시인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첫째수의 초장과 중장의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미완의 느낌이 든다.

 

단풍도 처음에는 연초록 잎새였다

너와 나

사랑으로 뒹굴고 엉클어질 무렵

목이 타

붉게 자지러져

숨이, 탁!

끊긴다.

(김영재 시인의 “단품” 전문)

 

김영재 시인의 “단풍”은 종장의 처리가 눈에 띈다.

칼로 어떤 물체를 내리쳐 잘라내는 느낌 같이 화끈하게 내용을 반전시켜서

결론을 독자의 코 앞에 드리밀고 있다.

가파르게 올랐다가 급하게 떨어지는 감각적 표현이 마치 절벽에서 구러떨어져 붉게 피어난 단풍을 보는 것 같다. 하나의 좋은 표현형식으로 기록될만하다.

 

얼마큼 끈을 조여야 옮기는 발이 편할까

그 까만 눈동자들 내 마음에 새긴 다음

가난을 앞장세우고 높은 산을 타야 하니.

 

등을 누르기만 하는 짐덩이를 고쳐 메고

나른히 늘어지는 긴 능선을 접어 올리며

아직은 쉴 수 없는 걸음 돌아보지 않는다.

 

먹이를 찾아 나서는 저 여윈 은여우처럼

비탈 위로 올라서서 눈을 크게 뜰 적마다

더욱 더 두껍게 되어 무감각한 내 발바닥

 

다만 고된 짐꾼으로 줄을 잇는 나의 생애

함박눈이 찾아와서 지난 일을 덮을수록

갈 길은 기울어지고 산은 멀리 나앉는다.

 

(김재황 시인의 “셰르파가 되어”의 전문)

 

김재황 시인의 “셰르파가 되어는 또다른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은여우처럼 살아야하는 세태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걷다가 보니 무감각해진 발바닥을 고백하고 있다. 그 인생길에서 갈길은 먼데, 그 길은 더 멀어져간다는 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다.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의 세계로 다시 그려낸 것이 김재황 시인의 능력이다.

 

이 밖에도 정휘립의 “눈은 내리고”, 조동화의 “오리발에 관하여”,

신군자의 “뇌졸증”, 채천수의 “연민”, 이양순의 “아침바다” 도 역작으로 시조단의 큰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