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표현(詩的表現)의 문제
-시조세계 2002년 봄호를 중심으로-
지성찬(池聖讚)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시인들이 광화문의 거지보다 많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다. 이말에는 첫째로 시인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시인이 그정도의 수준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나 그 이면에는 시인의 질을 질타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시단의 현실이다.
문제는 다수의 시인 아닌 시인들이 쏟아내는 악화(惡貨)들이 문단을 오도하고, 계속해서 악화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좋은 시를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자연히 발표되는 불량작품을 모방하여 더 많은 불량작품들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잡지에 발표되는 수 많은 작품들 중에서 좋은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필자는 잡지의 신인상이나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에 대하여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 것은 그들이 등단후에 발표하는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이하인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몇몇은 예외이지만.
시조세계 2002년 봄호에 게재된 모든 작품을 일일이 지적할 수 없기에 좋은 시조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자 한다.
각종 잡지에 발표되는 시조들을 보면 많은 시조시인들은 자유시와 시조를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발표되는 시조가 자수율의 형태만 지녔을 뿐, 시적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적표현이 없는 시조는 시조도 아니고 자유시도 아닌 것이다.
이글에서 언급한 작가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사실 문단활동하는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苦言을 하지 않고 입에 달콤한 얘기로 오도하고 있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많은 작가가 사장되고 있다. 양약(良藥)은 고구(苦口)하고 충언(忠言)은 역이(易耳)니라(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된 말은 귀에 거스린다)라는 말로 이글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첫째로 좋은 시조가 되기 위하여 시조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하고 끈끈한 삶의 이야기와 모습을 담아야 한다. 모든 예술, 이를테면 문학, 미술, 음악등이 담아야 할 내용들은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많은 작품에서 놓치는 것은 담아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점이다. 발표되는 많은 작품에서 표현대상의 외형만을 묘사한 것을 보게된다.
이를 테면
산중 그 때 그 집에는
참새 몇 옹기종기
낯선 불청객에 후르륵 짹짹, 갸웃갸웃
이 빠진 질그릇 속엔 흙이끼만 어지럽다.
와 유사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글은 산골마을의 한 풍경을 언어로 그려놓았을 뿐, 거기에 삶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좋은 사진기로 현장을 포착한 사진의 역할이지 시의 역할은 아니다. 아무리 글로서 현장묘사를 빼어나게 한다하더라도 사진을 능가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 함정에 빠져있음을 본다. 시는 어떤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결 잠든 아늑히 깊은 내안
만선의 하얀 피곤 현관 가득 부려 놓고
창 낡은 신발 한 켤레 불을 맞대 놓는다.
(이기라의 “삶”의 둘째수)
는 그 내용이 삶의 내면을 그리고 있어서 위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서 전자의 글과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위와 같은 글이 되는 원인중의 하나는 시적표현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시적표현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시적표현방법으로 어떤 대상을 “설명” 또는 “묘사”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설명하는 기법”으로 쓰면 아니된다는 말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의 외형을 글로서 그대로 그려서 옮겨놓은 것을 말한다.
냇가에 달맞이 꽃은 때도 없이 피고 진다
베어내고 꺾어도 다시 또 웃자라서
중천의 달을 안고자 相思로 피었다.
위의 글에서 종장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달맞이 꽃에 대한 외형적 설명에 그치고 있다. 그 내용 또한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내용으로 전혀 새로움이 없다. 시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내용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시에서 요구하는 것은 항시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위의 글을 다음과 같이 개작해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된다.
밤이면 달맞이 꽃은 몸이 너무 뜨거워서
시냇물로 몸을 식히며 별자리를 헤아렸다
어쩌다 달에 안기면 창백하게 꽃이 진다.
이 표현기법은 동사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로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각장의 맨끝의 단어가 동사로 된 구조에 유의해야 한다. 이 글이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또한 동원된 언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시적분위기로 표현되는 것과(나)) 설명으로 표현하는 것(가)과의 차이에 대하여 더 상세히 설명하면
가령 어느 아름다운 여인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
가) 그 여인은 백옥같은 얼굴에 눈은 흑진주처럼 빛나고
입술은 잘 익은 앵두를 입에 문 것처럼 아름다웠다.
나).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거실, 유리탁자 위에 장미 한 송이 꽃혀있는 오후에 그 여인은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는 꿈을 꾸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가)는 인물의 모습을 설명으로 묘사하여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고
나)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인물을 어느 조성된 분위기 속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인물을 묘사를 하고 있는, 가) 보다는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 분위기속에 인물을 대비시킨, 나)로 표현된 여인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즉 시적표현의 비법은 분위기적 시적표현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ㄱ) 해질녘 고등어 한 손을 들고 집으로 가는 사내의 얼굴에 노을이 지고 있 었다
ㄴ) 산에서 나무를 한 짐 지고 내려오던 그 사내의 손에는 진달래꽃이 쥐어져 있었다.
ㄷ) 검은 가죽잠바에 청바지의 팽팽한 탄력이 가죽잠바를 잘 떠받치는 그 사 내의 금테안경엔 차가운 빛이 번득였다.
위의 ㄱ) ㄴ) ㄷ)에서 표현된 의 세 사람의 사내는 성격, 옷차림, 환경, 교육, 문화적 배경등이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분위기적 표현방법이 시적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법이다.
셋째로 문맥의 흐름이 유연하고 통일되어야 한다.
발표되는 작품들을 꼼꼼하게 따져가면서 읽어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않고
무슨 내용을 담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횡설수설형의 글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글을 쓴 사람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니 어느 누구도 감히 평을 할 수도 없다. 자신의 실력을 철저히 감추는 데는 이처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무릇 글은 표현은 쉽게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은 한 없이 깊고 오묘한 글이 좋은 글이다.
시에서 요구하는 “모호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모호성에 관하여는 아래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나룻배와 행인”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전문)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가슴을 뭉쿨하게 하는 많은 메시지를 충경적으로 가슴에 던져주고 있다.
열린시조 2002년 봄호에 자유시만을 발표해 오는 오세영 시인이 5편의 시조를 발표하였는 데, 그 작품의 수준이 범상하지 않았다.
그중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어지러워 어지러워
달빛에 어지러워
산사나무 그늘 아래 홀로 술을 든 날 밤엔
산도 함께 따라와
내 곁에 눕는다.
진한 머리 냄새, 아련한 그 체취
온 밤을 끌어 안고 뒤척이다 지샌 아침
창밖에 웃고 있구나, 막 벌어진 산사꽃
(오세영의 “부활” 전문)
가부좌 깊은 명상 나쁠 것도 없다마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해탈에 이르는 것
옳거니 네 잔등에 진 설악산을 버려라.
(오세영의 “바위” 중 둘째수)
지난 봄 복사 꽃잎 분분히 날릴 때는
가지의 모든 것들 남김 없이 버렸느니
이 여름 탐스런 열매가 서리서리 열렸구나
(오세영의 “성찰(省察)중 둘째수)
오세영 시인의 시적전개, 표현방법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어느 평자들은 이런 작품들을 낡은 작품으로 폄하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고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그 소리에 박수를 보내어 격려한다.
단연코 말하지만 위의 작품이 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영원히 시를 쓸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시조의 품격이 이런 수준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작금의 글을 보면 표현은 매우 어려운데, 하나 하나 들춰보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래의 글은 아무리 읽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객관성이 확보되지 아니한 글은 글로서 인정될 수 없다. 위에 열거한 오세영 시인의 시조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세영 시인의 시조는 쉽게 이해되면서도 그 뜻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아득한 물길을 터서 꼬릴 떨친 물거품때
헛헛한 머리맡의 첩첩 어둠을 흩어내다
제 꿈속 출렁인 외로움에 은빛 비늘이 잡힌 게다
얼마나 풍파를 털면 훌쩍 솟구칠 몸통이랴
해쓱한 지느러밀 밤과 밤의 별빛에 추켜
그 먼곳 아슬한 턱을 쳐서 돌아드는 빛 무리떼여
(연어에게)
어렴풋 갈피를 추켜 겨운 속안을 뒤척이다
자욱한 침묵 움푹 억척 어둠 뒤틀고 와서
어디쯤 휘청인 멀밀 가눠 꽃망울 먼저 터뜨리나.
(그 봄밤의 갈피는)
“자욱한 침묵 움푹 억척 어둠 뒤틀고 와서”에 이르면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무엇을 하자는 얘긴지 짐작조차 가늠할 수 없다.
넷째로 시조의 형식을 모르고 시조를 쓰는 시인들이 매우 많은 것을 본다.
즉 시조에서 기(起). 승(承). 전(轉). 결(結)의 기법을 모르고 시조창작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초장은 起에 해당함으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의 낮은어조로 표현해야 한다. 초장을 이어받아서 표현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 전개하는 중장이 承이 된다. 따라서 초장의 표현이 강하면 중장에서 이를 받아서 전개할 수가 없다. 종장은 轉.結에 해당하는 데, 종장에서는 초장과 중장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반전(反轉)시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던져라
두꺼운 살과 뼈와
질긴 願
저 깊고 푸른 沼 속에서
한 천년 썩어라
나뭇잎 한 장에 어리는
물무늬로 필 때가 까지.
(서숙희의 폭포)
서숙희의 “폭포”에서 초장의 내용은 비약적표현으로 보여진다. 또한 종장의 표현은 문맥과 어법도 맞지 않고, 轉.結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까닭에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또한 표현의 어조를 보면 초장의 표현이 제일 강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표현이 약해지는 것을 본다. 물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읽는 독자들이
느끼는 것은 점점 맥이 빠지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아래의 권혁모의 글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칠흑 어둠 속 별만 있는
어린이 추모관에 와서
차창 넘어 손 흔들던
인형 아이들을 떠올린다
아, 그 때
영롱한 너는
별이 되어 반짝이는가.
(권혁모의 “홀로코스트”의 첫수)
권혁모의 작품은 문장의 흐름이 막힘이 없이 3장의 연결고리가 확실하고
기.승.전.결의 원칙에도 충실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장에 힘을 주어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첨가하여 말하면 시적표현에서 강한 어조의 표현은 시적표현효과에서 장애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바꾸어 말하면 낮은 어조의 표현이 시적표현 효과를 더 배가할 수 있다.
다섯째, 어떻게 하면 감동을 주는 시적표현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시조의 아름다운 가락도 한 몫을 한다.
시에 담는 내용이 인생의 삶이기에 그 내용 또한 미완성의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표현된 내용도 부족한 부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표현을 위하여 동원되는 언어가 전체중에서 일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역할은 아주 지대하다.
마치 음식을 만들 때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분량의 조미료다. 작은 량이지만 조미료에 따라서 전체 음식의 맛을 좋게도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시에서도 이런 장치가 필요하고 아주 적절한 표현의 도입만이 시를 완성의단계로 도달하게 한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른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이호우의 달밤)
장마루 놀이 지면 돌아올 낭군하고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
제삿날 울어도 좋을 국화주나 빚어야지
(이우종의 산처일기)
이호우의 “달밤”에서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를
“낙동강 나루터에 달빛이 푸릅니다” (“빈 나루”를 “나루터에” 로 바꿈) 로
이우종의 “산처일기”에서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를
“백옥같이 아름다운 윤이 나는 항아리에”(“조금은 이즈러진”을 “백옥같이 아름다운”으로 바꿈) 로 바뀌어졌을 때 그 시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변함을 알 수 있다. 이호우의 달밤에서는 “빈” 이라는 단어가 이우종의 산처일기에서는 “조금은 이즈러진”이라는 단어가 시의 맛을 내는 조미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단어의 특징이 모두 “부족함” 또는 “결함”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즉 시적표현에서 이러한 단어들을 삽입하여 감동을 유발하는 장치를 하여야 한다.
주검의 불빛인양 집어등 반짝이면
날개 접은 새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목마른 세상 밖에서 빈 시간을 줍고 있다.
(김복근의 해 저문 동해에서)
김복근의 작품에서도 “빈 시간” 이라는 장치가 이 시를 시답게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의미상 중복되는 단어가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불빛인양”과 “집어등”인데 이렇게 의미상 중복되는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에 시적표현의 효과가 반감될 뿐 아니라 시어를 아껴야 하는 시조에서는 경계해야 한다. 위의 글에서는 “주검의 바다에서 집어등이 불을 켜면”으로 바꿀 때의 효과를 생각해 봄직하다.
위에 예시한 “달밤”과 “산처일기”의 특징중의 하나는 시조의 아름다운 가락이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시조에서 시조의 아름다운 가락을 놓쳐서는 아니된다. 시조의 설자리는 자유시가 확보할 수 없는 가락의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두 작품에서 동원된 단어가 대략 17개 전후이다. 시조 한 수의 음수율이 12 마디임을 고려해보면 시조창작에서 동원할 언어의 숫자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많은 단어를 동원하면 시조의 가락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즉 많은 단어가 많은 마디를 만들어서 시조의 가락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원로이신 정소파 시인과 송선영 시인의 경우는 문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분들인데 봄호에 실린 작품중 일부에는 너무 많은 단어를 동원하여 시조의 가락이 자유시보다도 더 껄끄럽게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해맑은 밝음에의 빛
비춰 오는 소리다
어둔 시절
흰옷 겨레
두만강을 건너가며
저물녘 산모롱이 거문가마 실려가며.
(정소파 시인의 “청성곡” 소리 속에는)
꼿꼿이 선 길등 하나 너무 밝아, 별이 안 보여
후미진 고샅 몇이 한결 더 침침하고
동구쪽
어위큰 어둠 한 채
긴 밤을 수자리하는
(송선영 시인의 “당산나무.2”)
그 엄동의 살 보다 더 깊이 박혀드는 거
골 깊은 빈집의 골 깊은 잠, 휘는 등뼈
봄 맞아
點,點, 움 틔움 빛
온 마을 감싸고 싶네.
(송선영 시인의 “당산나무.3”)
시조의 형식을 빌렸다고는 하나 필자는 시조의 맛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시조가락을 놓친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당산나무.3”에서는 명사를 나열하는 식의 표현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나열식의 표현법은 문맥이 끊기고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다. 시조에서 초장과 중장, 중장과 종장과의 연결이 확고해야 하나의 문장이 유기체로서 역동적표현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시상과 시적표현에 관하여는 별개의 문제로 남겨둔다.
여섯째는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작품이어야 하는 데, 이는 비유와 상징의 표현기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시에서 요구하는 모호성과 선명한 이미지는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모호성은 표현된 결과가 다의성을 내포함을 말한다. 따라서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된 시적표현이 주는 의미가 독자에게 여러 가지의 메시지를 동시에 줄 수 있을 때, 시에서 요구하는 모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예시한 오세영 시인의 “바위”에서 보면 “옳거니 네 잔등에 진 설악산을 버려라”에서 확실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도, 그 내용은 비유에서 파생된 효과로 여러 의미를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에서 모호성은
비유와 상징에 의해서 도출되는 시적표현의 기법이다.
모호성을 오해하는 나머지 핀트가 맞지 않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을
시적표현에서 요구하는 모호성으로 오해하는 듯 하다.
작자는 먼저 자기의 작품을 냉정하게 평가하여 하나의 독자로서 먼저 감동을 한 후에 발표해야 한다. 작자 자신이 감동하지 않는 글을 제3자인 독자가 절대로 감동하지 않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시조세계 2002년 봄호에 게재된 작품중에서 앞으로 성장가능성을 보여주는 시인들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처형이 다녀간 뒤
작약꽃 향 그윽하다
새벽햇살 함초롬히
꽃잎에 실렸다가
내 心想 텃밭 사이로
情을 듬뿍 쏟아놨다
두 손을 모아보면
고일 듯한 그리움이
달빛 풀린 봄길 따라
숨죽이며 흘러간다
밤새워 우는 소쩍새
홍역 하는 진달래꽃
(김강호의 “妻兄”의 첫수와 셋째수)
김강호의 “妻兄”은 시의 구조와 표현의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따스한 정서가 가슴에 다가온다. 시적표현방법, 전개, 그리고 시조 가락 또한 앞으로의 가능성을 기대할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적감동과 가슴에 스미는 따스함이 생각보다는 덜 느껴지는 것은 “情”, “그리움”, 같은 관념어의 삽입으로 사실적표현에서 멀어진 때문이며, 그 내용에서 보면 평이한 수준을 뛰어넘지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햇살” 이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새벽은 일출(日出)이전인 데 햇살은 보기가 어렵지 않은가 생각된다.
유리잔에 고이는 홍옥빛 차 한 잔에
투명하게 잠겨드는 초겨울 휴일 하오
적막도 다정한 벗인양 빈 어깨에 따스하다.
(서숙희의 “홍차 한 잔의 오후”)
서숙희의 “홍차 한 잔의 오후”는 잔잔하게 펼치는 시상의 전개방법에는 호감이 간다. 초장과 중장의 맨 끝의 단어를 명사로 마감하여 나열식이 되어 전체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흠이 있다. 시조에서 각장의 맨 끝의 단어를 동사로 마감하면 시조가 역동적인 표현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동시에 각장이 서로 잘 연겯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적막은 따스하다”로 요약되는 것으로 그 내용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적막이 따스하다는 표현은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적막”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적막도 다정한 벗인양 빈 어깨에 따스하다”는 누구에게도 공감을 얻기가 어려운 것은 자명하다.
시적표현이 단순히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기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서숙희 시인이 갖고 있는 시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고쳐가면서 정진한다면 새롭게 변모된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시집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한 유영애 시인은 시조의 형식은 어느 정도 익힌 것으로 생각되며, 시조에 대한 열정도 매우 뜨거운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시적표현방법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시조세계 2002년 봄호에 실린 작품들의 양이 상당하여 다 언급을 할 수도 없었다. 몇몇의 원로 중진 시인들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작품이 적었다. 하지만 내일의 시조단에 기대를 걸어보기 위하여 몇몇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뜨거운 일침을 가한 것은 앞으로의 성장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에 근거하였으며, 이를 너그럽게 수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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