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의 사설시조 읽기
산그늘에 묻고 보니
-채종해(69)
박 기 섭
아프다고 아프다고 노상 골골댈 때는 그저 산 목숨이 애꿎다 싶더만 막상 찬 이슬 내리는 산그늘에 임자를 묻고 보니 아침 저녁으로 눈길이 매양 글루만 가네
시아베는 젊어 훌쩍 만주로 가시고 홀시어미 수발들랴 여섯 자식 건사하랴 산밭 논다랭이 참 숱하게도 오르내렸지 그래, 그 고생도 모자라 늙바탕엔 몹쓸 병치레로 수척한 몸뚱어리조차 짐이었으니 그 심사는 또 오죽했을꼬
이 저승 엇갈린 연분을 새삼 말해 뭣 하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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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헌테, 그 놈의 막일헌테
-조덕근(58)
이쑤시게 못꺼정 중국서 다 들어오는 판에 이 바닥인들 성할 리 있나 그 놈의 구조조정 땜시 청년실업자는 자꾸 늘고 우리 같은 노틀은 다 찬밥 신세여 볼 것 없는 퇴짜 인생이제 글타고 딱히 어디라 갈 데가 있나 놀 데가 있나
신용불량자가 통장은 무슨 통장, 매양 일당에 허덕대는 꼬락서니가 고기로 치면 꼭 돼지 막창 신세지 여그 있는 치들은 말 그대로 다 파스 인생이라 처음 보는 이들은 그러데 누구헌테 맞었냐고 맞긴 맞었지 일헌테, 그 놈의 막일헌테 된통 얻어맞은 거제
비 치는 근로자 대기소에 죽치고 앉아 개평이나 떼는 게 고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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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을 거쳐온 비누거품솔이 목 뒤를 휘감을 때
-이남일(58)
가위를 숫돌에 가는 법부터 제대로 익혀야죠 그런 다음 가위를 드는 겁니다 무엇보다 가위 지나간 자국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좋은 이발이죠 나이 열여덟에 외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삼대를 물려온 집에 단골이 왜 없겠어요 다 그 덕에들 먹고 사는 거죠
연통을 거쳐온 비누거품솔이 목 뒤를 휘감을 때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나야 그게 진짜 면도죠 면도는 왼손으로 하는 겁니다 오른손은 면도칼에 그냥 대고만 있을 뿐 왼손 엄지와 검지로 살갗을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당기는 것 기술이라면 그게 기술이죠
저기 저 검은 색 말가죽 보이죠 저기다 비벼야만 제대로 날이 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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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독간장
-양창호(85)
며느리랑 둘이 합쳐 시집살이 아흔아홉 해째라 일년 모자라는 백 년이네 식솔이 많을 적엔 한 해 쌀 삼백 가마를 먹는 종가라 진솔 버선을 신으믄 그날로 다 해졌지 시조부님 입맛은 또 어찌나 고귀하던지 썰어논 김치가 네모 반듯하지 않으믄 바로 상을 물렸지 진짓상 볼 적마다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니깐
다들 알잖여 파평 윤씨 魯宗派 전독간장, 묵은장에 햇장을 부어 되매기장을 만들어선 독을 전하길 이 백년이라는 얘기지 장맛은 우선 메주가 좋아야 해 겉보기에 좋다고 다 좋은 게 아녀 속을 봐야지 잘 뜬 메주는 속에서 검붉은 빛깔이 우러나와 소금은 당진 소금밭꺼정 가 천일염을 사 오고
물이사 우리집 마당의 우물물을 덮을 물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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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이다지 길 줄 알았다믄
-한영후(85)
이젠 잊어야지……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디 자꾸 미련만 안고 있으믄 어쩌간 죽어 혼백이나마 고향 산천으로 가 지은 죄를 빌어야지 이별이 이다지 길 줄 알았다믄 뭔 일이 있어도 혼자 월남하진 않았어
함경도 홍원땅이 내 고향인디 아내와 어린 딸 셋을 두고 국군을 따라 내려왔지 지난 봄 중국 옌볜을 통해 우연히 ‘생전에 당신 편지 한 통이믄 원이 없겠다’ 는 북쪽 아내 편지와 남자 작업복 차림의 사진 한 장을 받았지 그런디 그 편지 마지막에 뭐라고 썼는지 알어?
(내 참, 이 죗값을 어찌 다 갚을는지……)
아 글쎄, ‘평생 잊을 수 없는 내 첫사랑 한영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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