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새책 또는 글 소개

박현덕의 시조 골목 외 5편

설정(일산) 2010. 6. 4. 15:19

골목 외 5편


  박 현 덕


 눈발 내리 퍼붓는 날 언덕길을 오른다 담장 끝으로

몰고 가서 사정없이 후려치는 눈, 집처럼 낡아버린 몸

뼛속 숭숭 바람 드는


 문득 점방을 만난다 사내들의 고스톱도 흰 밥꽃에 뒤

섞여 피고 지는 긴 하루다 저 뽕짝 강물 뒤척일 때 하늘

도 출렁출렁


 지친 몸 질질 끌고 오래도록 걸었다 햇살에 옥상 위

기저귀가 날아오르고 달동네 처마 밑에서 참새들이 라

면 먹는다


....................................


물은 흘러 어디로 갈까

-영등포 쪽방촌 3


 창문도 없는 저 아방궁 바람에 울먹거린다 나를 빼곤

전장에서 포획한 물건들 각자의 주인 버리고 숨죽이며

살았다 


 어느 여름 하늘이 괴성을 지르던 날 혹독하게 젖은

궁 물고문이 시작되고 보호소 유리창 열어 달빛을 따

먹는다 


 하늘은 태연한 척 햇살의 길 다시 내듯 거친 도시, 한

곳으로만 나는 자꾸 출렁대고 어둠이 불길한 예감을 슬

며시 안고 온다


.............................................


철새는 어디로 가야 할까

-영등포 쪽방촌 9


영등포역 대기실에서 아홉시 뉴스 본다

늦가을 한강 밤섬 북방 손님이 찾아와

저물녘 하늘을 덮은 군무, 화면에 담고 있다


나무처럼 야위어간 눈 침침한 사랑이여

서울 그 한복판 관통하는 강물로

끊어진 신경감각을 연결하고픈 밤이다


구호 같은 장대비에 철거독촉장 눌러 붙고

빌딩으로 둘러싸인 자본의 외진 섬에

오늘은 중풍을 맞은 철새가 기웃거린다


..............................................


십구공탄 



함바집 핥고 가는 물방울 소리 듣네


젖은 가슴 풀어 놓고 잡탕을 먹는 시간


바람이 서럽게 울며 나무 흔들고 가는 구나



공사장 핥고 가는 물방울 소리 듣네


종이박스 깔고 누워 새우잠을 청하면


뼈마디 바스러진 꿈, 연탄불이 울고 있다


...........................................................


매화가 흐드러지다

-영등포 쪽방촌 18


영등포역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매화나무

지난 겨울 뜬 눈으로 꼬박 밤새우더니

이 봄날 전신 뒤틀며 눈물 달아 놓는다


마파람에 슬며시 내려앉은 꽃잎들이

급식소 지나 쪽방촌 골목까지 날아와

몸 죄다 망가진 판잣집에 옴짝 달라붙는다


그날 이후 잠 못 드는 나날들이 많아진다

잠시 동안 살다갈 집, 만발한 꽃을 보며

얼굴이 홍매화 되도록 대낮부터 취한다


............................................................


송정리詩篇․4

-용보촌 그 거리를 생각함


탐조등 불빛 아래 나지막이 엎드린 거리

어등산 송전탑 부엉이처럼 눈을 껌벅

클럽 앞 스물 안팎의 여자애 울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공초소에서 본 용보촌은

세븐 스타 튜울립 술집들이 터를 잡아

밤마다 끈적한 몸짓으로 미군들을 유혹한다


편안하지 못한 생활 대못으로 내리 박혀

희망 같은 불씨 품고 하나둘씩 클럽을 떠나

흉흉한 소문을 남긴 채 미국행 비행기 탄다

 

박현덕 약력:

 

1967년 완도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87년 <시조문학>추천, 1988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1993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가 당선.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시집으로 『겨울 삽화』『밤길』『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

 『시조시학』편집위원 "역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스토리문학 6월호(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