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못한 마을
지성찬
욕탕에서 오랜만에 옛 벗을 만났다
옷을 버고 보니 자랑할 게 없었고
탱탱한 젊음은 없고 늙은 껍질만 물렁하다
벼슬이나 재물이나 다 소용 없는 것
욕탕에서 벗은 채 빈손으로 앉았듯이
그렇게 불려갈게 분명하다 가보지 못한 마을로
먼길을 가는데도 노자돈은 필요 없다
아무리 알몸에 치장을 한다 해도
모두 다 떼어버리고 옷 한 벌 입혀 보내니
천국 가는 택배 없어 보물 상자 보낼 수 없고
은행계좌 없으니 송금도 할 수 없는데
아직도 그리 쉬운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니
봄비, 그 환타지
1.
찡그린 하늘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네
겨우내 흙 속에 묻혔던 눈 먼 풀들이
어둠을 씻어버리고 눈을 뜨며 일어선다
2.
이웃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했나
너를 위해 울어 줄 사람 몇이나 있나
눈물은 사랑의 향기, 신묘한 약이어라
솔마루 은행나무
오고 가는 행인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솔마루 은행나무 그렇게 늙어간다
적막도 무거운 뼈대, 천년 하늘 떠받치고
푸석하게 늙어가도 연둣빛 옷을 두르고
열일곱 가슴으로 사랑을 노래하더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늙지 않더라
하루하루 살다 보면 백년도 잠깐이더라
봄이면 봄에 취해 여름엔 여름에 취해
그렇게 세월은 가더라 자취없이 사라지더라
솔마루 놀던 해가 솔숲으로 숨어들면
떠돌이 철새들도 이산포에 발이 묶이고
갈대는 물위에 뜬 채 흔들리고 있더라
가을엔 모두 버리고 먼 길을 떠나야 하리
세상사 모든 인연, 매듭을 풀어버리고
계절의 문을 잠근 채 묵시록을 읽고 있다.
열매, 그 아름다운 생명
꽃은 온 몸으로
그린 얼굴이다
꽃이 진 자리에
혼이 사는 작은 그 집
죽어서
살아나는 생명
그 영원한 안식처여
어머니의 행주
본래는 순백색의 깨끗한 손이었다
밥상 닦고 그릇 씻으며 축축히 젖어 살며
낯 한 번 세우지 못하고 해져서 찢긴 세월
어머니는 행주였다 어린 새끼 보살피던
깨끗한 그릇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쓰레기 되어 흙이 되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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