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문단의 평가

싱그러운 초하의 시조단-권혁모

설정(일산) 2013. 4. 10. 13:45

스토리문학 6월호 원고 - 권혁모

 

싱그러운 초하(初夏)의 시조단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鄭澈)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야 하는 강계 기생 진옥(眞玉)은 술상을 앞에 두고 거나하게 취하여 이렇게 서로 화답하고 있었다.

“玉이 玉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 볼가 하노라.”

“鐵이 鐵이라커늘 섭철로만 여겼더니 /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 볼가 하노라.”

정철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오동잎 지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쓸쓸한 밤, 박꽃처럼 예쁜 한 기생은 가야금을 타고, 거기에 시조로 화답하며 마주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시조야말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성과 본능을 멋들어지게 녹인 문학 최고의 예술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옛시조는 문학 본래의 기능보다는 효용 가치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에 반하여 현대시조는 문학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심미적 기능에 한결 치중하게 된다. 정철의 ‘옥’을 육체적인 상징이라 한다면, 다음 작품의 지성찬은 ‘옥’에 감정 이입(empathy)을 할 수 있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탐조하여 옥의 이미지에 치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달빛에 비춰보면 굽이치는 장강(長江)이여

불거진 태산준령, 칭칭 감아 흐르는 밤

차라리 어둠 속에서 숨어숨어 우는구나

 

쥐어짜면 푸른 물이 쏟아질 듯하건마는

더도 덜도 없이 간직하는 침묵의 빛

빛으로 문을 두드려야 가슴을 여는 너는

 

헤집고 들어서면 푸른 숲이 울창하고

한 마리 산새 울음, 정적에 금이 가네

영겁을 오르내리는 선율로 흔들리네.

- 지성찬의 <옥(玉)>의 부분, ‘화중련’ 제7호

 

지성찬은 <옥>의 첫 수에서 중심 소재인 옥의 정의를 “달빛에 비춰보면 굽이치는 장강(長江)”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떻게 파란 옥을 달빛에 비추어 볼 생각을 하였고, 또한 어마어마한 중국 대륙의 역사를 감아 흐르는 양자강(아니면 불특정의 긴 강)이라 했을까? 시의 들머리부터 시인이 보는 눈의 유장한 깊이를 직감하게 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태산준령을 칭칭감아 흐르는 밤이며, 다시 새벽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 숨어 운다고 하였다. 여기서 ‘어둠 속 숨다=신비’이며 ‘운다=탄생’이라 한다면, 이는 이육사 선생의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연상하게 한다.

 

둘째 수에서는 단지 고체에 불과한 옥을 두고, 쥐어짜면 푸른 물이 쏟아질 듯하건만 알맞게 간직한 침묵의 빛이었기에, 그 빛이어야만 너의 가슴을 연다고 하였다.

 

마지막 수는, 이제 시인 자신이 옥에 들어가서 만나는 신비를 묘사하고 있다. 푸른 숲이 울창하고 산새 울음에 금이 가더니, 이윽고 영겁을 오르내리는 선율로 흔들린다고 하였다.

 

지성찬은 옥에서 대단한 발상을 저지르고(?) 있다. 이미 굳어진 상투적인 관념덩어리(dead metaphor)를 배제한 가운데 예측이 불가능한 새롭게 보기를 시도하였다. 어제의 굽이치는 장강에서 오늘 침묵의 빛이 여는 가슴으로, 그리하여 미래의 숲 속에서 흔들리는 선율로 이어지는 한 편에는 화려함이 있고 장중함이 있으며, 긴장감을 풀지 못하게 하고 있다.

 

3수 안의 수(首)와 수, 장(章)과 장 사이에 감추어진 깊이와 폭을 아우르는 공간은 무한으로 확장되어 있다. 어쩌면 진부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는 <옥>의 소재로 이만치 존재의 외피를 벗기기란 쉽지 않다. 사유의 문을 끝없이 열어 두었으며, 무생물에 생명 현상을 무리 없이 이입할 수 있는 건 외형만치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앞의 작품을 통하여 정형 시조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다. 한 편이 45자 내외의 시조로는 복잡다단한 현대를 담아내기에 부족하다는, 그래서 긴 산문시이어야 한다는, 중언부언까지도 가능한 자유시가 바람직하다는, 혹은 정형 시조의 그릇으로는 아니 되겠기에 자유시와 변별력(구조적이거나 표현 방법에서)이 없는 사설시조를 아무 부담 없이 발표하였던 것 등이 오류였고 편견이었음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 여 전사들의 오른쪽 가슴은 왼쪽보다 작다고 한다. 그것은 가슴이 발달하기 전에 어머니가 딸의 가슴을 불로 지져 없애버린 것이다. 여 전사들이 창을 던지고, 활을 쏠 때 거추장스러운 오른쪽 가슴을 어릴 때부터 밋밋하게 만들어야만 전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이다. 또한 오른쪽 가슴이 발달하지 않아야 그 쪽에 갈 양분이 오른팔로 가서 전투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섬뜩한 신화 이면에 선안영의 가슴 이야기는 수줍고 향기 나는 삶 가까이에 닿아 있다. 딸아이의 가슴에서 비롯된 추억을 더듬은 선안영의 <풋 앵두 필 때>가 입가에 웃음이 묻어나게 하고 있다.

 

갓 돋은 가슴 쥐며 아프다는 열세 살 딸애

녹두알만한 꽃눈처럼, 잎눈처럼 자리 잡은

수줍게 부풀어 오를

아, 봄날의 꽃봉오리

 

어머니는 아프고 덜 여문 내 젖가슴에

새빨간 아까징끼 발라서 후 후 불어

새 숨을 불어넣다가도

푸훗- 자꾸 웃으셨네

 

딸아이의 젖가슴에 약 발라 불어주다

나도 풋- 자꾸만 웃음이 번져오네

구근(球根)을 옮겨 심은 듯

입과 입 숨이 타는.

- 선안영의 <풋 앵두 필 때> 전문, ‘시조21’16호

 

사랑과 새 생명의 시발인 작은 가슴, 어머니가 본 어린 딸아이의 가슴은 얼마나 예쁘며 귀여웠을까? 그래서 첫수는 “수줍게 부풀어 오를 / 아, 봄날의 꽃봉오리”라고 화두를 끄집어내고 있다. 둘째 수는 딸아이를 통하여 한 세대 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아까징끼 발라 새 숨을 불어넣는 모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마지막 수는 다시 화제가 딸아이에게 옮겨가서 아파하는 가슴에 약을 발라주고 있다. 자신의 어릴 적과 닮은 모습을, 마치 구근을 옮겨 심은 듯하다고 하였다.

 

여자 아이 사춘기 때의 젖앓이를 아까징끼와 어머니의 입김으로 어떻게 다 진정시킬 수 있을까만, 그것은 반드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가장 부끄러운 것까지도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믿음이었기에 모녀의 정은 가이없다고 하는 것일까? 딸의 가슴을 통하여 자신의 세월을 발견한 이 작품은 모녀 관계의 행복한 순간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보영은 광주 금남로에서 격정의 한 시대를 반추하고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를 추상같은 명령(?)으로 증언대에 불러 세운 시인의 감회는,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과 어떻게 견줄 수 있을까? 시인에게는 아픈 과거마저도 추억이 되어 펼쳐질 미래를 향해 고운 향기를 흩고 있다.

 

먹구름 밀려오고 세찬 바람 불어와도

때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서서

여름은 너무 짧았다 할 말 아직 남았는데

 

오래 전 저 나무와 함께 최루탄을 맞고서

떨어진 여린 꽃은 어느 가을로 지고 있나

달려온 세월보다도 노랑 잎이 너무 곱다

 

잊혀진 이름들을 한 사날 불러보면

잎사귀 진 나뭇가지 새순 다시 돋아나와

배고픈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꽃이 필까

 

모두 다 떠나가고 함성도 멎은 지금

나이보다 더 늙어버린 우리들의 오랜 친구

아직도 참선하는 중 누군가를 기다리며.

- 이보영의 <오래된 은행나무(-금남로에서)> 전문 ‘시조세계’ 2009. 봄호

 

광주의 금남로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가 보다. 그래서 그 고목에 격랑의 한 시대를

오버랩 시키며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힘겨운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할 말은 안으로 감춘 가운데, 두 눈 지그시 감고 있는 은행나무를 서두로 설정하여 두었다. 둘째 수는 최루탄 맞은 나무와 낙화 사이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의 노란 은행잎을 떠올리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이미 고혼이 되어버린 이름들을 부르면 그 그리움들이 새순으로 돋아나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이제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상처가 아물고 있는 지금, 고락을 함께한 오랜 친구가 되어 지난날을 참회하며, 새 희망의 구원을 기다리는 시인의 꿈이 진솔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실 참여시는 자칫 자신의 과도한 정감(emotion)으로 인하여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설정해 둔 목적 지향 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이보영의 <오래된 은행나무>는 가치 판단을 위한 목적을 배제한 가운데, 은행나무가 겪어 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고 있다. 엄연히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를 은행나무에 접합시켰을 뿐, 시시비비는 자신의 몫이 아닌 독자 편으로 돌려주고 있다. 이것이 시의 품격을 유지하는데 기여를 한 것이다.

 

이번 호의 멋들어진 작품 군은, 존재의 외피를 벗기고 사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지성찬의 <옥>과, 딸아이의 가슴에 얽인 모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선안영의 <풋앵두 필 때>, 그리고 냉철하리만치 안정된 마음으로 질곡의 세월을 되돌아 본 이보영의 <오래된 은행나무>이다. 어느 것이 진정한 순수 서정이며, 아름다운 생활시이며, 지향해야 될 현실 참여의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주옥편이 싱그러운 초하(初夏)의 시조단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