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 외 1편
정일남
거미가 허공에 그물을 살짝 걸쳐놓았다
저것이 함정이란 걸 아무도 몰랐다
어디서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걸려든다
저런 저런 저것이…
날개로 몸부림치지만 벗어날 희망은 고갈되었다
허공이 몹시 흔들린다
어디 숨어서 잠자던 긴 다리가
성큼 성큼 걸어와서
밧줄로 챙챙 묶어놓는다
한동안 하늘이 요동치다가 조용해졌다
적막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마침내 시체해부 같은 식사가 진행되고
결국 날개만 폐허처럼 남았다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풍경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에는 달이 성큼 성큼 걸어와 걸린다
검은 다리가 이번엔 달에 옮겨 붙는다
달도 거의 반은 뜯어먹혔다
몽상夢裏
내가 걸어온 길이 탈 없이 거기에 그렇게 있어서
누가 걸어오고 있을 것이고
내 앞에 또 누가 가고 있을 것이다
천박해서 속됨을 자백하지 못하고
바람을 깨물어 씹으며
꽃을 눈에 담는 게 꿈이었을까
생은 꽃이 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았다
노래와 침묵의 경계에서
낮달은 내 귓등에 붙어 연인처럼 따라온다
꽃은 나무가 꾸는 꿈처럼 왔다가 간다
진달래꽃 속에 내가 눈을 씻고 들어가 보았는데
여덟 개의 수술이 하나의 암술을 에워싸고
다툼이 없이 호흡이 맞았다
열매도 맺지 못하는 몽정들아
내 귀가 받아먹은 불임의 말들아
시인의 몸은 젓가락처럼 마른다
사념과 짝한 생애에서
볼펜의 거미줄로 꿈을 엮던 肖像
손톱으로 잠금장치를 닫는다
꿈밖이 꿈일 줄이야
정일남
197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대문학> 추천완료.
시집 『어느 갱 속에서』, 『들풀의 저항』, 『유배지로 가는 길』, 『꿈의 노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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