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고의 색조로 조형된 영상의 미학
지 성 찬
2008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시조세계가 탄생된지 만 9년을 맞게 되었다. 이제 10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시조세계의 나무도 이제는 새들이 깃들어 노래할 만큼 성장하였다.
어느 예술분야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문학예술 분야의 작가들은 무엇보다 정의의 편에 서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생각을 갖도록 스스로 자아를 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술을 빌미로 하여 입신양명하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형편없는 작품들이 과대포장에 과대평가되는 일은 마치 시정잡배들의 협잡이나 사기행위와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문학예술은 결코 입신양명을 위한 사치품이 아니며, 그 것이 최종목적이 될 수도 없는 일이다.
더러운 것을 비단으로 포장을 한다고 해서 그 속의 더러운 것이 좋은 것, 아름다운 것으로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하기사 농사를 짓다보면 보리밭에 깜부기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하지만 아직도 훌륭한 인품으로 시창작에 열중하는 소수의 작가들이 있어 큰 위안을 받는다.
볼펜의 색상은 충전된 잉크의 색상으로 나오게 마련이듯이, 시조에 담겨진 모든 것은 작가의 삶과 사고로부터 유로된 결과물임은 재론한 여지가 없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실존을 간명하게 그리고 적확하게 표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실현된 자기의 위치와 경제적 소유물들이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표로 생각하고 있다.
자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생각함”으로만 가능하다.
시 창작에서 사고력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며, 사고력은 그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사고력의 투명성, 관찰력, 인식능력, 객관적 판단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독서이며, 좋은 작가는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조세계 2008 가을호에도 좋은 시인들이 지면을 빛내주었다. 근자에 언급한 시인들은 제외하고 몇몇 시인들의 작품만 살펴보기로 하였다. 언급하지 않은 작품 중에도 좋은 작품이 있음을 밝혀둔다.
김영재 시인의 “바위와 소나무”는 두 사물을 대비하여 시를 전개한 형태가 이채롭다.
바위와 소나무
함께 못 살 것 같지만
바위에 솔씨 떨어져
말없이 안기면
신랑이 신부를 맞듯
바위가 틈을 열었다.
(김영재 시인의 “바위와 소나무” 전문)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못 살 것 같은데,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부드러운 나무의 뿌리가 단단한 바위를 어떻게 뚫어가면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가 말이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 보다 더 강하고 질기다. 생명체인 소나무가 바위 보다 강하다. 고목의 큰 가지는 큰 바람에 부러지고 꺾여지지만, 능수버들 나뭇가지는 결코 부러지거나 꺾여지는 법이 없다.
물은 그 부드러움이 세상 만물 중에 제일이지만 그 어떤 힘으로도 제압할 수 없고, 그 어떤 무기로도 상처를 낼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물을 제압할 수는 없다.
이 부드러움의 철학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소나무는 목재로서는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그 자태는 한결같이 수려한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간신히 뿌리를 박고 있는 소나무는 예술작품이다.
바위와 소나무는 사실 서로 잘 맞지 않는 관계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사이다. 금강산이 아름다운 것은 바위로 된 그 산이 많은 나무를 안고 키워가기 때문이다.
바위가 있는 산은 그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결코 삭힐 수 없는 몇 개의 돌을 안고 살아갈 때, 그의 인생은 더욱 큰 복락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소나무의 부드러움과 바위의 강함이 서로 대비되 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높고 낮음, 깊고 얕음, 크고 작음, 흑(黑)과 백(白), 음과 양, 열과 냉, 암수, 뭉침과 흩어짐, 명(明)과 암(暗)등 서로 상반되고 상치되는 관계속에서 긴장과 화합의 균형으로 자연법칙에 따라 이 우주가 운행되고 있음을 본다.
소나무와 바위로 대비된 부드러움과 강인함은 서로 대결구도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적 관계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위치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인생도 이 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하고 보완하는 이치를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다.
신필영 시인의 “해후”는 인생의 쓸쓸한 가을날을 산책하고 있었다.
두다 만 바둑판 헛집도 같은 쓸쓸함을
잔술로나 씻어보는 객기는 아직 맞수
우리는 해묵은 가양주 그 빛으로 익고 있었다.
(신필영 시인의 “해후”의 둘째수)
인생은 어쩌면 “두다 만 바둑판”인지도 모른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 것도 같다. 바둑을 두다 보면, 집이 되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집이 되지 않는 공간도 있다. 집이 되지 않는 공간은 공연히 돌만 허비한 헛수고의 결과이다. 능력 있는 고수는 몇 개의 돌로도 큰 집을 짓지만 하수는 여러 개의 돌을 놓아도 집이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확실한 집을 짓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인생도 그와 같이 헛집 같은 계가로 인하여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 상정이다.
사실 인생에서 무엇을 쌓거나, 쟁취한다고 해도 결코 자기의 것이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
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많이 가지려고 하고, 일시적으로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만 결코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쓸쓸함 가운데서도 신 시인은 좋은 옛 친구와 마음을 나누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무엇엔가 쫓기듯이 살아가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유로운 마음에서 신중한 결정이 도출될 수도 있고, 인생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임영석 시인의 “절벽 위에서”는 말 그대로 절벽 위에 서 있어 본 자기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절벽이 자석처럼 내 발을 꽉 잡고 있어
아무리 발을 떼도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다
마음이 자꾸 뒷걸음쳐 손에 땀만 가득하다
두 손에 땀을 쥐고 살아온 나의 생이
얼마나 높았으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발아래 텅 빈 허공이 무덤처럼 보인다
삶이란 저 허공을 오르고 오르는 일
수많은 모래알이 반짝반짝 빛나는 건
허공을 오르려다가 무너진 눈물의 빛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
이 절벽에 서보면 그러면 알 것이다
이 세상 삶의 높이가 그 얼마나 낮은지
(임영석 시인의 “절벽 위에서” 전문)
절벽 위에 서 본 사람만이 절벽의 무서움을 알 것이다. 작가는 현재도 그 절벽 위에 서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 그 절벽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많은 땀을 흘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절벽에서 내려다본 허공의 무서움 또한 대단하다. 그 무서운 절벽에서 인생을 볼 때, 인생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임 시인은 말하고 있다.
퇴로가 없는 절벽은 공포이며, 절망이지만 작가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고 투쟁하며 싸워가고 있는 인생의 투사다.
허공은 어쩌면 이루지 못한 아쉬움의 공간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루지 못한 자기의 꿈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은 저 허공을 오르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허공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목표이고 설사 오른다고 해도 그 허공을 사람들은 지킬 수도 없다.
허공을 목표로 많은 땀을 흘리며 사람들은 살아가지만 그 것은 헛고생일 뿐이다.
허공에 집을 짓고 산다한들 그 곳은 낙원이 될 수도 없고, 그 곳에서 기쁨의 세월을 보낼 수도 없다. 우리는 허공을 목표로 하고, 허공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기쁨이 있는 낙원에 꿈을 심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그 기쁨의 집은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임 시인은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인생을 알게 되었고, 많은 독서를 통해서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채천수 시인은 일상을 통해서 얻은 소재를 여유롭게 반죽하여 평범 속의 비범함을 보이고 있다. 채 시인의 시창작 방법도 세월 속에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저 오는 사람들 피곤과 때를 돌보며
때밀이를 한 지도 벌써 20년이네
내 청춘 비눗갑에 갇혀
비누거품 다 됐어
속 때는 못 벗기도 겉 때만 벗기지만
단골이 아니라도
대충 몸을 보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내 눈에도 더러 보여
사는 일과 몸뚱이는 무슨 등식이 있나봐
굽은 노인등이
벼랑으로 보일 때가
내 나이 쉰 조금 넘어 큰 수술한 뒤였지
(채천수 시인의 “목욕탕 孫氏” 전문)
글을 보면 글을 쓴 작자의 인격을 알 수 있듯이, 얼굴과 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는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영혼의 집인 육체는 영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 둘은 서로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 또 받는다. 즉 영혼은 육체에게 영향을 주고, 육체는 또 영혼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애기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을 들라면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병이 들면, 영혼의 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시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겉 때는 깨끗하게 잘 벗겨주지만, 속 때는 벗겨줄 수가 없다.
속 때는 결국 자기의 몫인데 이는 자기의 의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 표현들을 넓게 펴서 살펴보면 사람들은 겉은 잘 꾸미고 화려하게 분식하지만 내면의 세계는 간과한다는 것과, 또한 잘 분식된 겉 포장들이 각자의 실존적 자아라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첫수에 표현한 “비누거품”은 흘려보낸 세월의 덧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지며, 셋째수의
“굽은 노인 등”은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하여 굽어진 인생관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진솔한 삶을 통해서 자기의 생각을 펼친 채 시인의 시적능력을 보여주었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오종문 시인은 9편의 신작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역작이지만 그 중에서도 “산다는 것은”이 특히 눈에 띄었다.
바람에 몸 맡기고
그 떨림을 느끼는 것
날 밝기 전 움켜쥐는
그 돌멩이 같은 것
최후의 순간을 위해
남겨두는 한 점 눈물
(오종문 시인의 “산다는 것은-心法.6” 전문)
“산다는 것에서” 오종문 시인은 삶은 “바람에 몸 맡기고 그 떨림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람은 이 세상을 비유하는 것인데, 바람의 속성은 첫째, 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둘째, 바람이 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으며 셋째,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불며 넷째,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다.
그 바람은 많은 사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낙엽이 바람을 만나 들판으로 날리기도 하고 시궁창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도 세파의 바람 속에서 이와 같은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바람에 떠밀리어 다니면서 그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껴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언제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의한 결과도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중장에서 표현한 “날 밝기 전 움켜쥐는 그 돌멩이 같은 것”에서 오 시인의 돌같이 단단한 각오와 다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돌멩이 같은 것이 오 시인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인생의 깨달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헌신짝처럼 여기고, 변하고 썩어져 없어지는 돌멩이 같이 쓸모 없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그 것을 쟁취하는데 몰두하는 것이 인생이다. 오종문 시인이 일생일대의 큰 변화를 맞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인생은 기쁨의 눈물을 떨구기도 하고, 슬픔의 눈물을 떨구기도 한다. 인생은 어쩌면 눈물 젖은 한 장의 손수건은 아닐까. 오 시인에게 큰 복을 받는 때가 도래한 것으로 믿어진다.
신진 시인들의 작품도 (김기석 시인의 “바람.2, 3”, 김향진 시인의 “우도 고양이”, 이명희 시인의 “가을이 왔나보다”, 차문성 시인의 “그곳은”) 시조세계 지면을 빛내는데 일조하였다.
그 밖에도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모두 언급하지 못하여 아쉬웠으며, 지난 1년간 둔한 필력으로 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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