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이렇게 쓴다
-시의 맛을 내는 비결-
지 성 찬
시의 재료가 경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 시의 근원적 배경도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경기도 안성의 산과 들, 그리고 안성천, 그 시절에 보고 경험했던 여러 가지의 일들이 뇌리에 진한 영상으로 남아서 후에 시창작의 밑그림이 되었다. 진달래를 꺾던 유년시절, 추운 겨울의 썰렁한 들녘, 황금빛 넓은 들녘이 던져준 깊은 인상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 나와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시조가 안성예찬이다.
이 시조는 안성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로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비봉(飛鳳)에 올라서면 옥산들이 넉넉하고
항시 젊은 청용산(靑龍山)은 자리 걷고 일어선다
안성천(安城川) 생수(生水)로 흘러 마을마다 살아 있고
섬바위골 홍시처럼 열이틀 달이 뜨면
동문리(東門里) 미루나무 숲, 잠들 줄을 모르는데
초집의 올린 등불을 가릴 수는 없어라
선율이 굽이치는 청포도 넝쿨 따라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는 포도알의
맺힌 그 이슬 속에서 한 세월을 보았느니
순박한 손끝으로 흙을 빚어 혼을 부어
가슴에 불을 질러 항아리를 구워내어
하늘도 천년 하늘을 불룩하게 채웠나니.
(필자의 안성예찬 전문)
시 한 편을 완성하는데 필자는 보통 한 달에서 길게는 몇 개월 동안 작품을 손질하는 습관이 있는데, 작품을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되어서야 잡지에 발표해 왔다. 아무리 긴 시조라도 예외는 없었다. 이것이 다른 시인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1982년 여름 강원도 해수욕장에서 초장 한 구절을 얻었는데, 그 귀절이 좋아서 시조를 완성하는데 약 1년 정도를 소비하였다. 그것도 단수 시조를. 그 때가 문단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때였다.
“세월을 풀어내어 바다를 채웁니다”라는 초장을 버릴 수 없어서 많은 고심을 했지만 좀처럼 중장과 종장을 이어나갈 수가 없어서 가슴만 답답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때는 마치 소화불량증 같이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거의 1년 후에 완성된 시조가 별.1982 라는 작품이다.
세월을 풀어내어
바다를 채웁니다.
어느 작은 물새가 되어
물 한 모금 찍고 가면
낙도(落島)의 맑은 하늘에
별이 하나 돋는다.
(필자의 “별 1982” 전문)
이 시의 이미지는 “작은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그 작은 이미지에 잘 맞는 단어를 선택하여 배치하였다.
즉 “물새, 한 모금, 찍고, 낙도, 별”로 이어지는 언어들이다.
“물 한 방울”이 아닌 “물 한 모금”이 되었고, “먹고 가면”이 아닌 “찍고 가면”으로
된 것이다. 이 작은 이미지는 인간이 아주 작고 미약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 시가 의미하는 개략적 큰 의미는 “인간이 아무리 큰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것은 마치 한 마리 새가 그 넓고 넓은 바다에서 물 한 모금 찍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줄거리이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이 우주의 광대함과 위대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근자에 두 작곡가가 필자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시조를 골라서 작곡한 사실에 필자 또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표현의 어색한 부분을 많은 시간을 두고 수정해 가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에 따라서 그 음식을 평가하고 또 그 맛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시 또한 그 맛이 있음은 당연하다.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는 음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지만 그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 시에서도 시의 맛을 내는 비결이 있고
그 비결이 시창작의 비결이기도 하다. 시에서도 이와 같이 아주 적은 특별한 언어가 시의 맛을 좌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음의 두 시조 작품에서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이호우의 “달밤”의 첫째수)
장마루 놀이 지면 돌아올 낭군하고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
제삿날 울어도 좋을 국화주나 빚어야지
(이우종의 “산처일기”중 둘째수)
이호우의 “달밤”에서 보면 “낙동강 빈 나루에”서 “빈”이라는 단어가
이 시조의 맛을 살렸다는 점이다. 만약에 “낙동강 나루터에”라고 했을 경우에 이 시조는 전혀 가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우종의 “산처일기”에서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를
“하얗고 아름다운 윤이 나는 항아리에”로 했을 경우,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그러면 여기서
“빈”, “이즈러진”이라는 단어의 역할은 무엇이며, 시의 맛을 내게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시에 담는 내용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인생은 연약하고,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허점이 많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좌절과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인생을 상징하며 대변할 수 있는 언어는 “빈”, “이즈러진”과 같이 불완전하고, 약한 의미의 단어들이다. 이런 시적표현의 장치가 시창작에서 필요하다. 시 한 편에 이런 단어를 하나 또는 두 개쯤 넣어두면 시의 맛을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필자의 다음 작품들도 이런 비법으로 창작되어진 것들이다.
밑줄 친 단어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영산강 피로 흐르른 남도(南道) 천리(千里) 길
물결따라 흔들려도 다시 피는 풀꽃이여
물새의 젖은 나래는 마를 날이 없구나
(필자의 “남도천리” 첫째수)
하늘로만 오르던 미루나무 숲 둥우리
집을 비운 까치는 돌아올 줄 모른다
유난히 붉은 노을이 비원으로 타고 있다
(필자의 “어느 겨울” 둘째수)
나무는 서성이며 백년을 오고 가고
바위야 앉아서도 천년을 바라본다
짧고나 목련꽃 밤은 한 장 젖은 손수건
(필자의 “목련꽃 밤은” 전문)
저녁 연기 피어오르던 그 시절을 생각느니
차라리 몸을 태워 한 줌 재가 되더라도
연기는 맑은 하늘에 꽃구름이 되던 것을
(필자의 “삶.7” 전문)
많은 시인들이 시적표현에서 강한 어조의 언어를 많이 동원하는 경우를 보는데 십중팔구는 실패하는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그런 강한 어조의 표현은 시를 망치는 경우가 더 많다.
시창작에서 시의 도입부분은 표현의 어조가 낮고 부드러운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또한
문맥의 흐름이 좋아야 독자에게 자기의 표현이 잘 전해진다. 근자에 발표되는 작품의 내용이 과연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작가와 독자와의 소통이 되지 않는 글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시창작이 낭만을 노래하는 신선 노름만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시창작의 길이 험하고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의 이상적인 최종 목표는 높은 품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높은 품격의 예술을 동경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작가의 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하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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