殘高 외 1편
김정학
통장 잔고를 헤아리는 밤이었다
클락 공항의 밤은 깊었으므로 나의 행보는 분명해져야 했다
그리운 것들을 남겨두고 나는 돌아 가야했다
종려나무아래 서성이는 시간은 더디 흘렀고 주머니 속 잔고를 헤아리는 손은 혼자 서늘해 졌다 그러니까 그리움이라든지 따뜻한 웃음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내 우울한 미래라든지 그런 것들은 이제 내 통장의 잔고만이 증명해줄 것이고.
종려나무 가지는 늘어져 더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돌아갈 곳이 아직은 겨울이란 것쯤은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노가다판 용접기의 새파란 불꽃같은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고 굳게 믿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떠나야 하므로
남겨두고 남겨진 곳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깃 속에 부리를 묻고 잠든 새처럼 따뜻한 안식을
가득 가득 채워 넣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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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冬
더 이상 소식은 없었다
골목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백신을 맞으면 면역력이 생긴다는 말도
들끓는 열병을 재우지는 못했다
골목길을 허물고 새집들이 생겨났다
나는 떠나지 못했다
해가 뜰 때마다 새로운 어둠이 생겨났고
그저 독한 감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 몸도 매일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한 움큼의 입담배를 씹으며 보냈다
뒤적일 일기장도 편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꺾으면
간혹 낙엽들이 엽서처럼 흘러들고
햇볕은 쓰라렸다
그대가 버리고 간 시간들만
골목길에 길게 누워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늘도 담쟁이덩굴이 많이 앙상해 졌다
나
막다른 골목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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