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생성의 구조로 느끼는 시
-공광규 시인
임영석
이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없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간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이치를 깨닫고 느끼고 배우는 것이지만, 생명이 간직한 소중함은 어떠한 수식으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의 큰 절벽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때문에 무릎공부하며 벗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사람 삶 사이에 소멸되고 생성되는 마음의 집만큼이나 갈등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사라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있고, 영원히 다시 형성되지 않는 소멸을 통해 새로움에 대한 간절함을 염원하기도 한다. 소멸과 생성의 구조는 사람 삶에서 힘의 균형을 바라볼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필자는 공광규 시에서 소멸과 생성의 존재가 우리 삶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가를 확인하며 우리들 삶의 미래에는 삶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기로 한다.
말의 힘은 느낌이라 한다. 자연의 생성은 느낌을 간직한 말의 힘으로 축적되어 있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 피기까지의 세월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꽃이 필 수 있다. 때문에 꽃씨가 싹이 터 자란 시간이 꽃에게는 말의 힘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시에서도 말의 힘을 전달하는 느낌이 생성되게 충분한 힘을 소유해야 한다. 이것이 詩歷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얼굴반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공광규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에서
「얼굴반찬 」에서는 말 그대로 밥상머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어르신이 사라지고 없다는 소멸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삶의 문화가 얼마만큼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았던 시간이 불과 삼, 사십년 만에 우리들 삶에서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다. 빠른 변화는 빠른 변화만큼 그 속에 새로운 삶을 채워주지 못한다. 때문에 공광규 시인은 소멸되는 삶에서 새로운 삶의 맛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고 전재하며 소멸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과 사랑, 이해와 배려등과 같은 가족만의 뜨거운 정신의 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정신의 축이 사라짐으로써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황폐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가는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는 뉴스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의 어르신이 있을 때에는 그 밥상둘레에 모여 앉은 모습이 풀잎반찬이 올라와 있어도 화목하고 한 가족이라는 힘을 느끼고 살았는데, 고기반찬으로 밥상을 차려놓고 제 각각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가족이라는 느낌보다는 의무감에 떠밀려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이 되어 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인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힘이 무너지고 새롭게 생성된 것은 아이들은 학교로, 아내는 동창회로, 사료처럼 차려 있는 반찬을 앞에 두고 혼자 밥을 먹어야만 하는 현실만 앞에 있는 것이다. 소멸은 누가 극복해 줄 수 없는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지금 아무도 극복해 주지 못하는 공간으로 무한질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광규 시인의 얼굴반찬에서 나타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썩은 말뚝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삽으로 퍼올리는데
흙 속에서 누군가
삽날을 자꾸 붙든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랜 세월
논둑을 지탱해오던
아버지가 박아놓은
썩은 말뚝이다
썩은 말뚝 위로
흙을 부지런히 퍼올려도
자꾸자꾸 빗물에
흘러내리는 흙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기가
세상일처럼 쉽지 않아
아픈 허리를 펴고
내 나이를 바라본다
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흑, 하고 운다.
공광규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 》에서
예전의 농촌의 논들은 천수답들이였기 때문에 논에 물을 가두는 일이 가장 큰 일이였다. 말뚝을 박고 그 틈에 솔가지나 나뭇가지를 넣고 틈틈 흙을 채워 논둑을 튼튼해 해야 둑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시며 사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시인이 직접 논둑을 고치며 느낀 것은 “살아생전 무엇인가 쌓아보려다 / 끝내 실패한 채 흙 속에 / 묻힌 아버지를 생각하다 / 흑, 하고 운다.”는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 자신을 키우기 위해 아버지가 평생 해 온 일인데, 왜 무엇인가 쌓아보려다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는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자식으로써의 마음의 무게가 너무 깊고 뜨겁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썩은 말뚝 」에서도 소멸과 생성의 이중적 구조가 잘 드러나 있다. 살아계시지 않은 아버지 대신 그 자리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뚝처럼 자신을 지켜주었던 아버지는 마음속에만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써 자신에게 힘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떠한 일에도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 버거움을 “큰비에 무너진 논둑을 / 삽으로 퍼올리는데 / 흙 속에서 누군가 / 삽날을 자꾸 붙든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들 세상 삶은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다고 한다. 때문에 세상 삶에서 경험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고 한다. 경험은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새로움을 생성하는 마음을 지니게 한다.
느낌이란 마음의 집은 영원하지가 않다. 그 집은 기록으로 새롭게 형성 되였을 때 가치를 지닌다.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느낌은 반복적 사고를 통해 새로움을 탄생시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록은 유형적인 기록이 있고, 무형적인 기록이 존재한다. 무형의 기록은 전수를 통해 이어가겠지만, 유형의 기록은 창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소멸과 생성도 모두 유, 무형의 기록 속에 존재한다고 본다. 섞은 말뚝은 무형의 존재이지만, 시인은 아버지의 삶을 새롭게 유형의 존재로 이끌어내 재창조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흙집 사리
오래 살아서 장마에 쿵! 하고 무너진
시골 헌집 옆구리를 삽으로 파내는데
깨진 장독과 버려진 사기그릇과
녹슨 쇠붙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각난 오줌독과 개밥그릇도 나뒹군다
째그락거리던 식구들의 말소리와
염생이와 강아지와 동생들이 놀던 소리도 들린다
마침, 햇살이 들자
깨진 장독과 사기그릇과 오줌독과 개밥그릇과
쇠붙이 모서리들이 반짝거린다
수십 년 살다 죽은 흙집 사리다.
공광규 시집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사 》에서
「흙집 사리 」도 앞에서 예시한 두 편의 시와 흡사 비슷한 구조를 지내고 있다. 한마디로 시인은 과거의 삶에 대한 밀착된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삶에 애정이 많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튼튼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한 사람의 가정사가 작게는 한 개인의 운명을 달리 할 수 있고, 크게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소소해 보이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과거가 무엇이고,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역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삶 안에 우리들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리라 함은 석가모니나 성자의 유골을 말할 때 사리라 한다. 우리들 삶에서도 석가모니나 성자의 유골과 같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우리들 조상이 사용했던 밥그릇부터 수저 등등 온갖 생활용품이 바로 삶을 지탱해 준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다. 바로 그러한 성자의 말을 찾아내고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시인의 자세일 것이다. 흙집 사리는 우리들 삶 안에서 보아왔고 느껴왔던 말들이 내 몸 안에서 소중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공광규 시인의 시의 특징을 필자는 “소멸과 생성의 구조”로 보고 있다. 소멸되는 것에 대한 느낌을 다시 찾아내는 복원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에게 과거는 누구에게나 큰 자산이다. 그 자산을 소홀하게 넘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멸은 씨앗 같은 아름다운 가치를 남겨야 한다. 그 씨앗이 새로운 삶의 씨앗으로 생성되어야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 수많은 사물이 소멸되고 생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말의 느낌은 참으로 다양하다. 말의 힘은 느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 느낌을 바르게 인식시킬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좋은 시란 내가 느낀 느낌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시가 될 것이다. 소멸과 생성의 과정 안에서 그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 공광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유형의 소멸과 무형의 소멸이 어떻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띠고 느낌을 전달하는지 살펴보았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소멸의 과정에 있다고 보면, 그 소멸의 과정에는 분명 새로운 생성의 느낌을 전달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있다고 본다. 시 쓰기에 있어 소멸과 생성의 구조는 물과 불의 관계처럼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소멸과 생성의 관계를 직시한다면 좋은 시가 어떻게 탄생되는지 쉽게 가름 할 것이다.
공광규
1960년 4월3일 서울 돈암동 출생. 충남 청양 성장
동국대 국문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6년 월간 《동서문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1987년 시집 『대학일기』(실천문학사)
1989년 시집 『마른 잎 다시 살아나』(한겨레)
1996년 시집 『지독한 불륜』(실천문학사)
2004년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
2008년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5년 저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푸른사상)
2006년 저서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푸른사상)
2009년 저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화남)
1989년 제1회 신라문학대상 수상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대상 수상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
계간 《불교문예》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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