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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의 시평 (장문 시조에 대한 시평 )

설정(일산) 2010. 7. 30. 08:58

몸 주제와 바다 소재, 그리고 의인화

 

 

 

공광규(시인)

 

1.

시조문단에 제출된 장문의 시조 10편은 “자기 삶의 경험에서 양성된 정서의 압축”(<<나래시조>> 2010 여름호, 185면)을 완연하게 드러내면서 시조미학의 경지를 새롭게 창출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시들이다. 이러한 장문의 시조를 거칠게 유형화 하면 주제로서 상처와 고통 및 고단함으로 압축되는 몸, 소재로서 그리움의 형상물인 바다, 기법으로서 의인화를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몸, 육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상징의 샘이었다. 몸은 욕망과 쾌락, 통제와 억압이 충돌하고 얽히는 미혹의 장소여서 시에서 미학적 구조를 쌓는 중요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몸을 장문은 상처와 고통, 고단함이라는 주제의식을 다른 사물을 통하여 형상한다.

<거울 앞에서>는 거울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선인장>에서는 몸에 바늘을 꽂은 것처럼 생긴 선인장을 고통을 받은 몸으로, <버스>에서는 고단한 노동을 하는 인간을 오래된 버스에, <마네킹>은 우울증 걸린 힘든 표상으로서 몸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눈 가리고 싶었다

 

곳곳이 상처뿐인

이 몸이 내 것이라니

 

가슴 속

숱한 상처는

다행으로 못 보고

- <거울 앞에서/노동수첩> 전문

 

우리는 거울을 봤을 때 자신의 낮선 모습에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단순한 외모만 보고도 놀랄 수 있지만, 외모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읽어낸다. 화자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도 곳곳이 상처이며, 이런 상처투성인 몸이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가슴 속의 상처를 못 본다는 안도감이다. 외모의 상처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가슴 속의 상처를 못 보아서 다행스럽다는 표현이 미감을 더해준다.

그의 시조 <선인장>은 “살자니 몸 하나도/ 가누기가 힘이 든다/ 어쩌자고 제 생명에/ 바늘을 꽂았는지/ 그렇게 자해라도 해야/ 하루를 버텨내고”라며 몸에 바늘이 돋아 있는 선인장의 생물학적 특성을 바늘을 꽂은 몸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의 귀결은 “끝내는 토해낸 피로/ 꽃을 피워 환해지는” 선인장이다. 몸에 바늘을 꽂은 선인장의 꽃을 고난 속에 성숙한다는 인생의 원리로 밝히고 있다.

 

 

그 큰 덩치로도 가끔은 힘이 없다

노년을 쉰다 해서 미워 할 이 없는데

노동의 새벽길 따라 하루 꿈을 싣고 가는

- <버스> 2연

 

<버스>는 오래되어 상처가 난 버스를 노동에 지친 인간의 고단한 몸으로 비유하고 있다. 버스는 노동에 지쳐 고단한 인부들을 닮았다. 그 버스가 고단하게 잠든 인부들을 버스에 태우고 새벽길을 달리고 있다. 고단함과 발품을 팔러 가는 버스와 인부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비유가 풍부해진다. 일생을 노동으로 버텨와 힘이 다한 노년의 몸과 오래 사용하여 상처 난 대형 버스와 겹치고 있다. 버스는 “묵묵히 제 길 달린 대가의 흔적처럼/ 겉과 속 멀쩡하던 곳마다 상처들이 깊”은 버스 안의 인부들을 닮았다.

 

2.

의인화는 추상적인 성질이나 동물, 무생물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는 비유법으로 오래된 창작기법 가운데 하나이다. 의인화의 대상은 감정이입이 되어 생동감을 갖는다. 장문은 수사법으로서 의인화를 자주 구사한다. 위에 언급한 <선인장> <버스>를 비롯하여 <마네킹> <겨울 서정> <나무의자> 등을 들 수 있다.

<선인장>은 몸에 가시를 꽂은 인간의 몸으로, <버스>는 노동으로 오랫동안 발품을 팔러 다닌 인간으로 비유된다.

 

우울증에 걸렸는지

그녀는 말이 없다

철 지난 겨울옷을

새 봄 내내 걸쳐 입고

시장 길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 누가 그녀에게

웃음 찾아 줄 것인가

저마다 사는 것이

혼자 몸도 힘이 드는데

이웃과 쇼 윈도우 거리가

천리千里처럼 멀었다

- <마네킹> 전문

 

마네킹은 사람의 형상을 한 무생물이다. 우울증에 결려 웃지 않고 서 있는 마네킹의 ‘그녀’라는 인격적 호칭과 인간이 갖는 ‘우울증’과 ‘말 없음’을 부여한다. 인격화 된 마네킹은 옷을 걸쳐 입으며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한다. 마네킹은 우울증으로 웃음을 잃은 사람으로 인격화된 것이다. 창작자의 의도는 “저마다 사는 것이/ 혼자 몸도 힘”이 들고 이웃과 쇼 윈도우의 거리가 “천리처럼 멀”다는 진술을 통해 도시적 삶의 삭막함과 소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바람이네 그냥 가지 못하는

겉으로 웃는다고 웃는 줄 아는 건지

연못가 겨울 꽃들을 모두 다 건들인다

 

취미도 고약하다 밤만 되면 문 흔드는

문고리 잠겼거든 그냥 가면 될 것을

열리지 않을 줄 알면서도 끈질기게 버텨 섰다

- <겨울 서정> 전문

 

겨울바람의 특성에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될 때 바람은 부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가는”것이며, “연못가 겨울 꽃들을 모두 다 건들”이는 것이다. 바람은 사람처럼 ‘취미’를 갖는 것이고, 문을 흔들고 문 앞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서 있게 된다. 이런 의인화는 시에 생동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나무의자> 역시 의인화를 주요 기법으로 하고 있다. 무생물인 나무의자를 인칭인 ‘그대’로 칭한다든가, “뚜렷한 이목구비에/ 키도 크고 가슴 깊”다고 한다. 나무의자가 있는 산 속에서 화자는 의인화하여 진술한 “새들의 사랑가를/ 바람의 휘파람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앨범>에서도 시적 대상인 앨범이 인격화 되어 “그 많은 이야기들을/ 의리인 양 지켜”오고 “소문도 내지 않았건만/ 모두가 모여 있”는 것이다.

 

3.

소재 자체로는 작품이 될 수 없다. 소재는 창조되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일체의 재료나 원료를 말한다. 소재는 창조되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감각적, 정신적, 미학적 재료이다. 소재는 창작자의 감각과 인식이 가능한 일체의 삼라만상이다. 그러나 소재가 일률적일 때에는 소재주의가 되기도 한다. 소재주의는 창작자 개인의 일관된 탐구력과 정신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장문은 바다를 소재로 한 시를 세 편이나 선보이고 있다. 이 시들은 모두 그리움과 소망, 의지를 주제화하고 있다.

 

부표 같은 섬 하나

쪽빛 위에 띄워 놓고

석별에 젖은 입술

증표로 찍어 보내는 길

고깃배 사라진 자리

수평선만 아득하다

 

오늘은 오시겠지

오매불망 그 자리

떠난 배 소식 없고

금이 가 있는 바다

기어이 피울음 쏟아

물들이는 사연들

- <해금강 동백 > 전문

 

시인은 해금강과 동백꽃을 통하여 그리움을 형상하고 있다. 1연에서 섬은 부표로 직유되고 있다. 창작자는 석별의 상황을 “고깃배 사라진 자리/ 수평선만 아득하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1연에서 떠나간 사람은 2연에서 “오늘을 오시겠지”라며 기다림을 직설적으로 진술한다. 화자는 대상을 오매불망 그리고 있으나, 아직 “떠난 배”는 소식이 없다. 이러한 절절한 그리움은 피울음을 쏟아 물들이는데, 피울음은 동백꽃의 선연한 심상으로 떠오른다.

조용히 살고 싶어 예까지 떠나 왔소

그런데 산다는 게 왜 이리 적막한가

밤이면 별빛마저도 혼자보기 두렵소

 

파도는 붙잡아도 뿌리치고 가더이다

그렇게 떠나기를 수많은 세월인데

님 소식 안고 돌아오는 파도는 아예 없소

 

님 오면 드리려고 약초도 심어 놓고

철 따라 고운 그림 섬 가득 그리면서

십 년을 하루 일인 양 뱃길만 바라보오

- <섬/25시> 전문

 

인간이 약속한 시간 외의 시간인 25시는 화자만의 특별한 의미의 시간이다. 화자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섬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용한 것을 지나쳐 적막하며 두렵기까지 하다. 조용함이 적막함과 두려움으로 전화되는데, 이는 물리적 전화가 아니라 심리적 전화라고 할 수 있다. 2연에서 잡히지 않는 파도와, 그렇게 떠나갔어도 “님 소식 안고 돌아오지 않는 파도”가 없다고 부정한다. 3연에서는 2연의 돌아오지 않는 님에 대한 그리움, 기다림의 강조이다. 약초도 심어놓고 기다리고, 철따라 고운 그림을 그려놓고 기다리기를 십년을 해도 오지 않는 님 때문에 뱃길만 바라보고 있다. 화자가 그리는 님은 구체적 대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원초적 심리적 서정적 대상일 것이다.

전에도 그랬듯이 출항은 순조롭다

바다를 떠나서는 달리 길이 없던

천직을 사랑하면서 항로를 개척한다

 

언제 어디서건 복병伏兵들이 달려드는

종전(終戰)없는 싸움터, 생과 사의 바다에

그래도 우리는 간다 이기리라 믿기에

 

- <귀로 2004> 1,2연

 

위 시의 1연은 화자가 항로를 개척하는 선장으로 추정된다. 화자는 바다를 떠나서는 달릴 길이 없는 천직의 선장이다. 2연에서 바다는 종전이 없는 전장이며, 오직 이기리라는 믿음뿐이다. 바다에서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일 것이다. 이러한 인생은 어쩌면 “간밤의 꿈”일 수도 있다. 그래도 가까스로 살아남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바다와 배의 비유는 인생의 비유에 가장 적합하면서 흔하다. 시에서 항해의 목적은 만선이 아니다. 인생의 목적이 돈이나 물건이 아니듯, 행복한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시는 항해를 통해 도전적인 인생의 행로를 비유하고 있다.

시조는 한국 현대시의 종가이며 민족문학의 정수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시조가 현대시에 비하여 양적으로 밀리고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일정한 시기부터 시조의 창작자들이 현실 문제를 시조형식에 제대로 담아내는 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시조가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생각이다. 장문의 시조를 읽어가면서 이러한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출처: 스토리문학 2010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