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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섭<아내의 귀빠진 날>외 1편

설정(일산) 2010. 7. 30. 09:11

아내의 귀빠진 날 외 1편

 

황동섭

 

언제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조용조용 자기 할 일 외엔 거들떠보지 않고 꾸역꾸역 일만 한다.

그런 그가 언젠가부터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헝클어진 아내의 파마머리에 윤기가 가셨다.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흐릿한 길,

유리창에 박힌 실금의 그 길에서

이제 막 돋아나는 은행잎 싹에 물감을 칠하는 걸까?

그는 캔버스를 놓은 지 오래됐다.

글라스 블러드핀(Glass Bloodfin),

내장까지 훤히 비치는 열대어처럼 투명했던 몸은 

이끼가 끼면서 마른 입술까지 굳게 닫혔다.

애초에 날개 같은 건 없다는 걸 인정한 걸까?

교양으로 미소 짓는 옆 모습이 우울은 아니라고 했다. 

아침부터 질금질금 비가 내린 음력 3월 열사흘,

연분홍에서 붉은 기운을 돌아 다홍으로 가는 길이 열흘쯤,

생은 너무 솔직한 걸 싫어하는 걸까?

"태양을 담은 접시엔 올리브가 늘 함께 했다."라는 제목 아래

퍼거스紙에 실린 그리스 식당의 사진은

석양의 장엄함을 담은 황금색 유리창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 

 

 



면벽(面壁)

 

           그는 무릇 나체의 사상이란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이것이 그의

           입버릇이 되었다  -'황금의 환상', 다무라 류이지-

 

 

 


벽과 벽 속엔 늘 사람이 들어있고
유골의 잔해 속엔 수없는 벽이 녹아 있다
과묵한 벽은 천 년을 넘어서야 

기울듯 고개를 끄덕인다
모서리와 시간의 개입이 없다면, 벽은

신과의 소통을 위한 냉철한 문이며 성전이다
벽은 벽을 끌어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벽을 쌓아 못을 박고 갈라진 벽은 사람을 가둔다

한 철을 겨우 넘긴 화해, 담쟁이를 내세우는 게 아니었다
입이며 눈이며 귀인 그를 벽으로만 보는 편견이 위험하다

벽은 벽의 의미에 가득차서 벽을 낳는다
아름다운 것이 벽을 죽인다는 말은 낭설일 뿐이다

 

 출처: 스토리문학 2010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