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나루 그 주막
지성찬
어젯밤 대구의 <시하늘> 카페가 주관하여 치룬 시낭송회 행사후에 가졌던 뒷풀이 모임이 새벽까지 이어져서 동행한 일행들이 겨우 술에서 깨어난 시각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이번 행사의 주인공인 공광규 시인, 동행한 김시동 시인과 함께 해장국집을 찾아 들어섰다. 봄은 앙상한 나무가지에 윤기가 흐르도록 햇빛을 칠하고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얼큰한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면서 오늘의 일정을 의논 하다가 공광규 시인이 상경 길에 예천의 <삼강주막>을 둘러보고 가자는 제안을 하였다. 처음 들어보는 <삼강주막>이었지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주막이라는 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나름대로 여러가지의 그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예천은 안동, 영주와 더불어 경북 내륙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 많은 역사적 유물이 산재한 지역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서울 방면으로 가다가 구미시로 들어섰다. 정확한 지리를 몰라서 길을 물으며 <삼강주막>을 찾아가는 일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정확한 주소를 알아가지고 왔을 것인데 이미 시작된 일이고 보니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 눈에 모습을 나타낸 <삼강주막>은 큰 고목나무 아래에 얌전한 시골여인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안내인의 도움으로 <삼강 주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 나온 낙동강, 회룡포를 휘감고 뻗어 온 내성천, 죽월산에서 흘러 내려온 금천, 그렇게 세 줄기의 강이 만나는 곳이 삼강리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소재한 이 주막은 이 시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전통주막이며, 유옥연 할머니가 19세에 이곳에 시집을 와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약 70년간 <삼강주막>을 지켰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삼강주막엔 이제 전설이 된 유옥연 주모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마흔 살부터 여든아홉 살까지 ‘주모’라는 이름으로 주막을 지켜온 유옥연 할머니는 2005년 시월 초하루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주막은 밭 전田 자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두 개의 방과 한 칸의 부엌, 그리고 한 칸의 마루로 되어 있었다. 부엌에는 큰 옹기 항아리가 땅 속에 묻혀 있고, 무쇠솥이 걸려 있었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건축한 것이 특별하다. 이러한 건축물을 처음 접하였다. 또한 이 주막은 행동 반경을 매우 좁게 하면서 일하기 편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보부상이나 시묵객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었던 공간이었다. 부엌은 그을음으로 사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그 검은 그을음 바탕에 칼로 금을 그어서 외상값을 표시했다고 한다. 방이 두 칸인 것은 주인이 살림하는 방 한 칸과 손님을 위한 한 칸의 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부엌에 표시된 칼 자욱을 보면서 유옥연 할머니의 애환의 상처를 어렴풋이 보는 듯 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평생의 세월을 보냈던 그는 아마도 멀리 나들이도 못했을 지도 모른다.
마루는 강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서 멀리서 오는 손님을 보며 맞이하였을 것이다. 강 언덕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옥색 비단을 널리 펼쳐 놓은 듯이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넜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 삼강나루의 나룻배가 수 많은 삶의 이야기를 실어날랐을 것이다. 한용운 시인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문득 떠오른다.
4월의 새 봄볕은 병아리 깃털처럼 따스한데 주막에 뒷짐 지고 큰 덩치로 딱 버티고 서있는 몇 백년된 회화나무 고목은 아직도 잎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산과 풀과 나무, 그리고 먼 하늘만 바라보며 한적한 강가에서 오시는 손님을 기다리며 살아갔을 유옥연 할머니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도 받고 또 마음에 큰 상처도 받았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외롭게 앉은 주막을 지켜주는 친구 같이 느껴진다. 이 고목이 있어 유옥연 할머니도 위안을 받았을지 모른다. 쓰러져 가는 주막을 예산군청에서 다시 개축하여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지금은 경상북도에서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우리를 편하게 맞이하였다.
주모가 내주는 도토리묵과 따끈한 배추전 안주에 막걸리가 잘 어울리는 상차림이었다. 조선시대 주막에 앉아 술상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시중 드는 사람들의 복장이 조선시대의 것이었으면 더욱 좋을 듯 싶다.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밖에 없는가 보다. 산에는 올해도 진달래가 붉게 피었는데 한 번 간 인생은 진달래 처럼 왜 다시 피지 못하는가. 중국의 시인이 말하기를 매년 같은 꽃이 피지만 그 꽃을 보는 사람은 매번 다르다고 하는 말이 떠올랐다. 진달래처럼 아름답게 피었을 유옥연 할머니의 핏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한낮 나무도 수백년을 사는데 사람은 고작 몇 십년을 살다 간다.
돌아오는 길에 차속에서 삼강주막에 검게 그을린 부엌벽의 칼자국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귀경한 후에 유옥연 할머니를 생각하며 삼강주막에 대한 시조를 한 편 썼다. 벼슬을 한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삶을 살지 않았지만 유옥연 할머니의 이름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수많은 민초들이 밟고 간 삼강三江나루
그 때 그 풀빛은 오늘도 푸르른데
역사는 흙에 묻힌 채 흰모래만 곱구나
님을 기다리며 낡아가는 세월 속에
빈 나루에 작은 배가 밧줄로 묶여 있네
가끔씩 먼지바람에 풍문風聞만 쌓여가고
회화나무 가지 사이 하늘은 한 없이 높고
긴 세월에 남은 것은 썩은 가지뿐이네
육중한 몸으로 하는 말, 눈빛으로 알겠네
봄은 꽃을 들고 문 밖에서 기다려도
회화나무 검은 가지는 내다보지 않는구나
한 줄금 비라도 와야 문을 열고 나오려나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등잔불도 약해지면
주모酒母는 열사흘 달을 가슴으로 퍼 담으며
그 밤에 홀로 떠난 님을 물 위에 그려 보네
그을린 부엌에는 무쇠솥이 걸터앉아
주인을 땅에 묻고 홀로 남아 무엇 하나
언제쯤 새 주모酒母를 만나 한 세상을 끓여보나
거덜 난 팔자 같은 타다 남은 숯검뎅이
인생은 타고 또 타는 기름 같은 장작 같은
모두가 타버리고도 아쉬움은 재가 되고
감히 인생을 안다고 말하지 마라
그대 가는 길을 안다고도 말하지 마라
술에나 취하지 않고는 이 강을 건널 수 없네
여기 삼강三江나루 쉬어가는 나그네여
사랑은 풀꽃 같은 것, 풀꽃처럼 떠나셔도
천여 필 옥색 비단을 끊고 갈 순 없겠네
(『삼강나루 그 주막酒幕』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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