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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인생의 지피에스> 서평 (정용국)

설정(일산) 2015. 2. 6. 16:00

저물며 반짝이는 노을의 시학

- 지성찬 시집 『인생의 지피에스』 -

 

정용국

 

청춘의 아름다움이 생기발랄함과 도전정신에서 오는 것이라 한다면 노년의 무게감은 역시 경험과 연륜이 뿜어내는 긍정과 감사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젠 우리 사회에서 60대를 노년으로 보지 않는다. 70을 맞는 고희는 되어야 경노석을 넘볼 수 있는 나이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노년이 확장된 우리 현실에서는 이제 ‘나이 들어 감’에 대한 여러 가지 성찰과 사유들이 거론되고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방안들이 활발하게 개진되고 있는 것은 적당한 추세라고 여겨진다.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70대부터 노년이라고 한다 해도 그들이 누려야 할 시간들은 만만치 않다. 평균 연령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어서 보통 10년 이상의 노년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 기간들을 건강하고 품위있게 살아야 좋은 삶을 마무리 했다 할 있다. 이제는 중년 이후부터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노년의 원만한 경제생활을 위해 각자가 미리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이 두 문제에 크게 하자가 없다면 기실 노년의 삶은 여유롭고 외려 정신적 측면에서 본다면 청춘의 그것보다도 한 차원이 높은 사유와 성찰을 즐길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지성찬 시인은 고희 초반의 연령에 해당한다. 이번 상재한 새 시집 『인생의 지피에스』에는 바로 고희 뜰에서 여유롭게 사유하고 젊은 시절을 반추하며 지내는 시인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고 소소한 사물들과 자연 현상, 혈기 넘치던 감정의 격한 날들이 닳아서 부드러워진 둥근 모습들이 독자들의 등을 다독이고 위무해주고 있다. 이솔희 시인도 ‘물의 미학’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의 해설을 풀어내고 있으니 이 또한 노자가 도덕경에서 설파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덕목을 이 시집에서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집의 전편들은 가볍고 작은 사물과 감정을 소재로 택한 것들이지만 마치 노을이 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빛을 버리지 않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처럼 가지런하고 정갈하며 긍정과 겸허의 끝자락을 놓지 않는 따듯한 시인의 마음으로 가득하다고 하겠다.

 

삼십 년 끼고 살던 벽시계를 내다 버렸다

상면 유리 깨어져 금이 간 상처에도

아직도 흐르는 세월을 잘도 세며 살고 있다

 

받을 때와 버릴 때가 다른 것이 세상살이

그렇게 오고 가고 순환하는 법칙으로

오늘도 버리기 위해 물상들을 또 만난다

- 「세상살이 2010」 전문 -

 

‘삼십 년 끼고 살던’ 것이라면 40대 초반에 구입한 벽시계일 것이다. 아직 힘이 꺾였다고 인정할 수 없는 청춘이 40대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시간을 보며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약속을 하고 원고 마감 기일도 지켜주던 시계였을 것이다. 그 귀중한 물건이 망가져 ‘내다 버렸다’는 것은 ‘시계’를 통해 유추해보고 싶은 시인의 청춘이 아니었을까.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기이므로 곧 세월을 뜻한다. 이 사실은 시인도 늙어서 시계의 운명과도 같이 곧 세상과 작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시인은 끝까지 담담하게 마음을 잘 지키고 있다. 오히려 ‘오고 가는 순환의 법칙’을 말하고 있으니 마치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국외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리기 위해 물상들을 또 만난다’는 종장의 마무리를 읽고 나면 노을이 아름답게 지는 모습이 숙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필시 해는 내일 다시 뜨더라도 어느 날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쪄랴 그것이 ‘순환의 법칙’인 것을, 시인의 ‘세상살이’는 수긍에 안착하고 있다.

 

평생토록 온갖 잡것 밥통만 채워왔다

귀하신 그 밥통이 칼날에 잘려 나가니

그제사 밥통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았다.

- 「밥통의 가치」 마지막 수 -

 

고희를 맞아 지성찬 시인은 위암 진단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 일산의 한적한 곳에서 소일로 기원을 운영하였으나 마음은 그림에 있는 듯하였다. 붓글씨를 쓰다가 서양화로 공모전의 특선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70년을 새로운 시조와 경제인으로서의 역할로 도전에 응하고 거침없이 나갔던 삶이었는데 암은 시인의 마음에 큰 각성과 재고의 역할을 한 듯하였다. 암은 초기여서 복강경으로 진행된 수술은 잘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 이태가 지났는데 위 작품이 눈에 들어 왔다. ‘어머니가 소천하신 날’ 수술을 하였던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소삽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스친다.

 

‘섬뜩한 조명’과 ‘마취에 점령된 생명’이 ‘죽음의 연습실’에 놓인 자신을 추스르고 얻은 것이 위 마지막 수라는 생각이 든다. ‘밥통의 가치’를 알게 되기까지 70년이 걸린 것이니 위(밥통) 수술은 경건한 통과의례와도 같은 일이었다. 우리가 흔히 ‘위’라고 부르는 단어임에도 ‘밥통’이라고 해놓고 보니 위의 실체와 효용은 물론 얼마나 중요한 장기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시어로 아주 적절하게 쓰였다. 위암 수술을 받아 내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며 그야말로 밥통을 진짜 경물의 위치에 올려놓은 고희의 화평함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큰물에 나가 놀면

더 큰 세상 있다기에

 

산골의 작은 물고기

큰 강으로 갔었지요

 

큰 강엔

그물과 낚시

숨어 있을 줄 몰랐지요

- 「위험한 세상」 전문 -

 

그대여 겨울나무에 다가선 적이 있는가

조금은 금 간 허리에 따듯한 손을 얹고

힘겹게 수액을 빨아올리는 그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 「따듯함에 대하여」 둘째 수 -

 

시집 전편에는 위와 같이 고희의 찬찬함과 느긋함, 그리고 사랑의 손길들은 첩첩 다정하고 살갑다. 경험이 배어나는 「위험한 세상」은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 자상하고 걱정이 가득한 존칭을 구사하여 다정하고 은근함을 더 진하게 전한다. ‘겨울나무’에 다가서고 ‘금 간 허리’에 ‘따듯한 손을’ 얹어주는 노시인의 마음이 잘 우러나고 있다. 돌아보면 삶은 정말 ‘힘겹게 수액을 빨아올리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 고희의 전언이 새롭게 들려오는 지성찬 선생의 새 시집이 이 아픈 봄날 힘겨워 하는 청춘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