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문단의 평가

민달팽이의 시학- 임채성 (문학청춘 2017 봄호)

설정(일산) 2017. 3. 23. 18:13

<줌렌즈에 잡힌 시조>

민달팽이의 시학

 

임 채 성(시조시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빨리빨리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도에 중독돼 있는 것이다. 이동통신 광고처럼 빠르게, 더 빠르게를 외치는 현대사회는 스피드가 미덕인 시대다. 패스트패션을 입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LTE로 정보를 전달한다. 정보화 사회답게 네트워크 속도며, 컴퓨터 처리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사람들의 인내는 한계를 드러낸다. 퀵서비스니, 총알택배니, 로켓배송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피드에 목을 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직후 황폐화된 국토재건을 위해, ‘잘 살아 보세!’라는 모토를 내세운 새마을운동처럼 빨리빨리는 짧은 시간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만한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빠르다는 것은 능력이자 미덕이고, 느림은 실패이자 죄악으로 간주된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동작이 굼뜬 생물이 빠른 생물보다 도태될 확률이 높다. 이런 논리로 느림은 직장 생활에서도 무능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직장에서 빠름이 추앙받는 것은 경쟁 때문이다. 우리는 좁은 국토에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내수 시장도 크지 않다. 기본적으로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경쟁은 필연적으로 속도를 요구한다. 가격이나 품질 못지않게 속도가 비즈니스 성패의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의 최대 강점은 기술이나 품질이 아니라 영업과 마케팅이다. 한국기업은 세계 어느 기업들보다 시장 변화에 민감하고 시장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한다. 이것이 산업화 후발주자인 한국 기업들이 짧은 시간에 선진국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핵심경쟁력이라고 경제인들은 말한다.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의 빠름 증후군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각별하다.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간다. 하지만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만큼 잃은 것도 많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명의 속도에 휩쓸린 나머지 삶에서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마다 라이프스타일이나 사유의 속도가 다른데,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아름다운 주변의 풍경은 눈 밖으로 밀려났다. 목표점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다 보니 가족과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과도 멀어졌다. 일상의 궤도에서 속도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사람들은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찔한 문명과 물질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느림힐링을 찾게 되었다. 물질문명의 대명사인 메트로폴리스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인 여유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슬로시티운동을 주창했고, 패스트푸드의 대항마로 슬로푸드가 생겨났다.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올레길둘레길등 걷기열풍도 일어났다. 비로소 우리 사회가 느림의 미학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이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토닥여주고 위로해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처럼 한 박자 느리게 살아도 좋겠다는 움직임은 생활 전반으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 요즘엔 그 말조차 이벤트와 마케팅의 수단이 되어 버렸지만, ‘힐링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고질적인 빨리빨리 강박증을 내려놓아야 한다. 삶의 템포를 한 박자 늦추는 것, 그것이 곧 힐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덕이동 아침은 뻐꾸기가 먼저 연다

덩달아 작은 새도 푸른 음표 물고 가네

이렇게 살아있는 땅에 일어서는 들풀이여

 

비가 오면 새들은 죽은 듯이 뵈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겠네

 

-지성찬, 살아 있음이 행복이다전문, 화중련(2016년 하반기호)

 

 

시속 80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길가에 핀 풀꽃의 아름다움이나 나뭇잎에 그려진 그물맥의 세밀함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걸으며 그들과 눈을 맞추게 되면 그 모든 생명체에 깃든 본연의 특징과 자연의 신비로움을 알아차릴 수 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 제목처럼 느리게 생활함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행복은 물질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속도에서는 결코 바랄 수 없는 것들이다. 지성찬 시인의 깨달음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시인이 거처하는 덕이동은 서울의 위성도시 중 하나인 일산의 서쪽 경계에 있다. 그곳은 서울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일산신도시의 중심부가 아니라 중심부에서 멀어진 가장자리 동네이다. 흔히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삶은 소외지대로 인식된다. 하지만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주변부의 삶은 도심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연에의 동화와 여유로운 관조가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중심지역이다. 시인은 아침마다 뻐꾸기소리에 잠을 깨고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곳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싸인 죽은 도시가 아니라 들풀까지 일어서게 만드는 살아있는 땅이다. 새와 풀과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사람과 공존하는 곳이다. 살아있는 자연을 보면서 시인 스스로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 “살아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겠네라는 독백은 생명에 대한 경탄이자 스스로에 대한 존재증명이다. 두 수로 된 연시조에서 각 수의 종장을 이렇게로 시작해 살아있는으로 엮어가는 두운 반복기법은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귀납적 장치로 기능한다. 한때는 경제활동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었지만 이제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여유와 관조를 행복이라 여기는 늘그막 자연친화적인 삶이 가볍되 가볍지 않은 진중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순애야~ 날 부르는 쩌렁쩌렁 고함 소리

무심코 내다보니 대운동장 한복판에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어구야꾸 쏟아지는 싸락눈을 맞으시며

새끼대이 멜빵으로 쌀 한 말 짊어지고

순애야~ 순애 어딨노? 외치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황당하고 또 하도나 부끄러워

모른 척 엎드렸는데 드르륵 문을 열고

쌀 한 말 지신 아버지 우리 반에 나타났다

 

순애야, 니는 대체 대답을 와 안 하노?

대구에 오는 김에 쌀 한 말 지고 왔다

이 쌀밥 묵은 힘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래

 

하시던 그 아버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싸락눈 내리시네, 흰 쌀밥 같은 눈이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시네

 

-이종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전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황금알, 2016. 12)

 

 

가족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일에 빠져 가족을 돌보지 않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죽마고우나 학창시절 절친과도 연락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의외로 많다. 이처럼 속도에 경도된 물질적인 삶은 가족이나 친구 같은 소중한 존재들과도 멀어지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자신 또는 사회가 설정해놓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가족과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유대 관계가 느슨해지다 못해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구는 멀리 떠나버렸거나 예기치 않은 질병 또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경우가 많다. 피를 나눈 가족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들어보니 부모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삶만 쫓아다니고 있다. 이종문 시인은 아버지가 서 계시네에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관계의 아쉬움을 반어적 기법으로 토로한다. 서사적 얼개에 치밀하게 얹어놓은 해학적인 상황은 그 결말에 이르러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웃음의 정서는 시인 스스로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슬픔의 정한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읽혀진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에 나타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수사법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 시조는 중·고교 문학수업 시간이라면 수미쌍관법(首尾雙關法)’이라고 배울만한 처음과 마지막이 동일한 완결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태가 미세하지만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첫 수 종장에서는 아버지서 계셨다로 과거형이지만 마지막 수 종장에서는 서 계시네의 현재진행형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곧 회상과 추모라는 시점에서 빚어진 시차 때문이다. 우연한 계기로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 시적 화자가 그 과거를 발판으로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다시 기억(혹은 추억) 속에 되살려놓은 것이다.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가 대구에서 유학 중인 딸을 위해 싸락눈이 내리는 날 학교까지 쌀을 짊어지고 오셨는데, 딸은 학교까지 찾아와 자기 이름을 불러쌓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는 서사적 진술은 중년 이후의 독자라면 쉽게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아버지가 무덤 속에 계시는데그때의 그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그것도 흰 쌀밥 같은 눈. ‘흰 쌀밥 같은 싸락눈은 결국 돌아가신 아버지의 현신이기 때문에 쌀 한 말 짊어지신 아버지는 여전히 그곳에 서 계신 것이다.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경북 내륙지방의 토속어는 생생한 현장감과 해학의 질감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처럼 이종문 시인은 시가 진지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시대에 이왕이면 쉽게 이해되고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시, 가락이 펄펄 살아있어서 술술 읽혀지고 외워지는 시,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거느리고 있는 시, ‘이게 정말 시야?’ 라고 생각되면서도 시가 아니라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를 추구한다. 그는 형식미와 율조의 감칠맛이 요체인 시조를 현대시의 한 절편으로 고조시킨다. 능청스럽게 반전과 해학과 풍자로 흔들어대는 열린 의식과 말부림의 기교는 시조의 읽는 맛과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럴 때 재미란 말은 단순하지 않다. 재미를 느끼려면, 말 속에 기존의 관념과 질서를 흔드는 어떤 기운과 끼가 있어야 한다. 이종문 시인은 쾌활하지만 삶의 어둠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내적 힘을 통해 그 기운과 끼를 준동시키는 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삶의 무게조차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래서 그의 시조는 리듬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무거움과 가벼움, 어둠과 밝음, 쾌활함과 잔잔함, 유머러스함과 비애감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작 태도는 다음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무심코

대추 하나

와락,

깨물었죠

 

벌레

한 마리가

어쩔 줄을

모르데요

 

우주가

천둥을 맞고

두 동강이

났거든요

 

-이종문, 무심코전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황금알, 2016. 12)

 

 

어찌 보면 지극히 사소한 사건 하나를, 우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빅뱅의 단초로 읽어내고 있는 시인의 심미안이 놀랍다. 대추 한 알을 깨무는 행위가 그 속에 들어있던 벌레 한 마리를 놀라게 하고, 그 놀라움은 우주가/ 천둥을 맞고/ 두 동강이 나는 것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다는 과장된 점층의 시각은 단순한 재미로만 읽을 수 없다. 그것은 광대무변한 우주적 질서에 이르게 하는 노장철학의 무극(無極)사상까지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이 지구에서는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우주라는 공간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면 대추 속의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니던가. 따라서 대추와 벌레는 인간세계의 축소판이자 시적 은유인 셈이다. 이렇게 이종문 시인은 그 특유의 해학성으로 말미암아 시가 되기 어려운 지점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중에서 웃는 것은 인간뿐이라며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로 웃음을 꼽은 바 있다. 웃음은 서양에서는 유머지만, 한국에서는 해학(諧謔)이다. 해학의 사전적 의미는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을 말한다. 해학의 ()’는 화합하고 조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의 해학은 예로부터 전설, 민화, 탈춤, 판소리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전래되었다. 한국인의 해학은 고단한 현실을 유쾌하게 만들기 위한 삶의 지혜였다. 또한 니가 하마터면 날 밟을 뻔 하고서는 엄마아~ 비명 치며 아예 뒤로 넘어가데// 죽어도 내가 죽는데 니가 와 그 카노 니가?”(이종문, 니가 와 그카노 니가? -민달팽이 하시는 말전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처럼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평범함에서 강력한 자장을 뿜어내는 비범함을 포착해낸다. 단순한 웃음이나 일회성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슬픔마저도 이겨내는 여유와 따뜻함의 서정은 그 자체로 바쁜 현실에서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휴지(休止)의 공간을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박 일병 정시에 귀대 예정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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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항복하세요!

스마트한 웃음보

 

여보, 퇴근 후 사랑역에서 만나요

이제 보니 너랑 나랑 똑같은 모텔이네

지금 막 마음버스 탔어

다운 받은 행복 앱

 

-이소영 한 끗 차이전문, 시조시학(2016년 겨울호)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에 웃음과 여유를 전해주는 이종문 시인의 해학성은 이소영 시인에게서도 포착된다. 해학은 우리의 평범한 삶과 밀착되어 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한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이 빈번해진 요즘, 문자로 전해지는 타이핑 실수가 불러오는 촌철살인의 웃음은 그 의외성으로 인해 더욱 큰 재미를 안겨준다. 당사자들은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정도로 민망함의 최절정을 맛보겠지만 보는 이들은 배를 움켜잡는 통쾌함과 유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소영 시인은 한 끗 차이라는 작품에서 이런 인터넷 유머의 한 대목을 시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제목이 의도하는 한 끗 차이는 자음 하나, 모음 하나 잘 못 씀으로 인해 빚어지는 의미의 반전을 가리킨다. ‘충성!’ 해야 할 것을 총성!”이라 하고, ‘고객호객으로 생각하는 인터넷 쇼핑몰의 의도치 않은 진심어린 고백에는 사회 풍자의 메시지도 담겨있다. 전통 예술로부터 전승되어 온 우리의 풍자는 흔히 해학과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풍자의 웃음이 공격성을 띠는 데 반하여 해학의 웃음은 연민을 유발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풍자는 사랑을 위해 모텔을 찾는 오늘의 세태를 비추기도 한다. 그 사랑은 너랑 나랑 똑같은획일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사당역사랑역이 되고, ‘모델모텔로 탈바꿈한 것이지만 시인은 그 속에서 해학으로 버무려진 풍자를 놓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인터넷에 떠도는 오타 실수의 유머집을 시조 율격에 맞춰 재생산한 것이라면 시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소영 시인은 그 점을 간파한 듯 웃음이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뒤돌아서서 한번쯤 상황을 되짚어보게 하는 여운을 불어넣고 있다. 현대인에게 해학은 보다 밝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에너지다. 그래서 시인도 현실에서의 웃음을 행복 앱이라며 다운 받기를 권유한다. 자연서정과 엄숙주의에 물든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뒤편이 익숙한 채 사과나무 늙어갔다

 

사람이 지나가고

와삭 밟힌 뒤편,

 

오그린 장수풍뎅이 발 하나 뭉개졌다

 

그늘에 눌려 살아도 다치지 않던 그들

 

상처가 많아졌다

 

새살이 돋을 무렵

 

사람들 다시 돌아와 사과 가득 담아갔다

 

-이태순 뒤편의 그들전문, 정형시학(2016년 겨울호)

 

 

쉴 새 없이 주름잡는 앞바다 꼬드기듯

밤새껏 갯바람은 휘파람 소릴 냈다.

산다화 환한 봄날은 그렇게 찾아오고.

 

포구 옆 자투리 터 파릇한 쑥 돋아나면

길 잃은 괭이갈매기 맴돌다 날아들고

웃으며 팔을 벌리는 여자는 등대였다.

 

자자한 뱃고동소리 북적이는 섬마을에

때 만난 고기처럼 파닥이는 아침이면

빗장 푼 파도 소리도 가슴팍을 갈마든다.

 

뭍으로 가는 뱃길 바다로만 열어놓고

무젖은 치마폭에 닻을 내린 섬 사내들

그 닻줄 벼릿줄 삼아 섬 하나를 건진다.

 

-김범렬 노화도 시편2전문, 좋은시조(2016년 겨울호)

 

 

영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무대 위에 선 배우"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듯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은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가정이나 단체, 사회라는 무대로 초점을 줌아웃 시켜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곳엔 분명 주연과 조연이 상황에 맞게 나누어져 있다. 가령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부모에게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자식인 셈이다. 그들은 자식이 더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받쳐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앞쪽보다는 뒤편에서, 빛보다는 그늘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속적인 성공에 집착하지도 않고, 물질적인 삶을 탐하지도 않는다. 조연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태순 시인과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뒤편의 그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태순 시인의 뒤편의 그들뒤편이 익숙한늙은 사과나무를 조명한다.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케도 하는 이 작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말이 없는 성자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장수풍뎅이 발 하나 뭉개질 정도로 사람들이 무참하게 밟고 지나다니는 뒤편그들은 서 있다. “그늘에 눌려 살아도 다치지 않그들이지만 새살이 돋을 무렵에는 상처가 많아진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기력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들도 이젠 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살을 돋우기 위해 감수해야하는 나무의 상처는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헌신과 희생의 과정이다. “사람들 다시 돌아와 사과 가득 담아갔다는 표현 속엔 누가 알아주지 않는 몰인정한 현실이 담겨 있다. 이처럼 상처를 통해 키워낸 달콤한 열매를 자신들의 업적인 양 당연하게 뺏어가는 앞쪽의 존재들은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시인은 그들이야말로 이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은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장과 장 사이의 거리를 한껏 펼치는 중간생략 기법을 통해 상징과 은유의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단단한 심미적 완결체로 귀결시킨다. 아낌없이 주는 사과나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삶의 진실을 설파하는 심오함을 품고 있다. 그늘진 무대의 뒤편에서 밝은 곳까지 동공을 확장시킨 시인은 마지막 방점을 찍듯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 희생과 봉사의 아가페적 가치를 가슴 시리도록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태순 시인이 우화적인 접근방식을 택했다면 김범렬 시인은 현실을 보다 직설적으로 풀어낸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억척스런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억척스러움은 투박하지만 부박하지 않다. 열심히 살지만 탐욕스럽지 않다. 자연에 맞서 살아가지만 자연을 정복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런 순박한 사람들을 품어 안은 노화도는 대지적 여성성이 충만한 곳이다. “산다화 환한 봄날” “포구 옆 자투리 터 파릇한 쑥 돋아날 때 길 잃은 괭이갈매기에게 웃으며 팔을 벌리는 섬의 아낙은 등대와도 같다. 등대가 뱃사람들에게 항로를 일러주듯, 등대로 치환된 여자또한 섬의 모든 존재들에게 삶의 이유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빗장 푼 파도 소리도 가슴팍에 들일 정도로 품이 넓은 여자의 무젖은 치마폭에 닻을 내린 섬 사내들때문이다. 거친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살아가는 섬 사내들에게 가정이라는 기댈 언덕을 만들어 줌으로써 섬 하나를 건질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어준다. 스스로 주인공이자 하는 욕심을 거둔 뒤편의 그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뱃고동소리 북적이때 만난 고기처럼 파닥이는 아침등의 표현은 그와 같은 섬마을 특유의 역동성을 대변한다. 진술과 묘사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생동감이 넘치는 노화도의 정경을 그려냄으로써,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여유로운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는 너를 그만 놓아줘야 할까보다

내리 딸 둘을 낳자 사흘이 멀다 찾아와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

시어머니 눈칫밥 같은

 

어디서 구했는지 흰 접시꽃 세 뿌리

벼슬 붉은 장닭 넣고 삼세번만 고아 먹어라

서둘러, 꽃 지기 전에

그래야 약발 받는다

 

그 여름 바람 타던 아들 낳는 비법들

때마침 할망당에 비손하는 접시꽃

꼭 무슨 빚쟁이처럼

여태껏 따라다닌다

 

-문순자 흰 접시꽃전문, 문학청춘(2016년 겨울호)

 

 

사려 깊은 사람처럼 속이 꽉 찬 배추와

저 혼자 양껏 자란 청무 잎을 만난 저녁

어머니 손맛 떠올라 입에 침이 고인다

 

살짝 데친 잎에다 송송 썬 추억을 얹어

된장까지 올린 쌈을 미어지게 한 입 물면

햇살에 그윽해진 맛이 입 안 가득 번지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일테면 비로소

무진장 엄마 맛이 그리워진다는 것

어릴 적

데면데면하던 일들이

때로 몹시

고픈 것

 

-권영희 시간이 고이는 저녁전문, 시조21(2016년 겨울호)

 

 

시인들에게 어머니란 생명을 점지해준 모태이자 지울 수 없는 기억의 감옥, 새로운 미래를 비춰줄 거울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모성에 대한 애틋한 기억과 경험이 도저한 서정의 나이테를 감아올리는 것이다. 문순자 시인 또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젊은 날의 한때를 반추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사랑과 그리움의 친정어머니가 아니라 눈칫밥으로 대변되는 시어머니다. 한동안 친정 바다라는 연작 시편을 통해 친정어머니와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를 시로 형상화하던 시인이 이제는 시집살이에 대한 애환을 풀어낸다. “내리 딸 둘을 낳자 사흘이 멀다 찾아와” “어디서 구했는지 흰 접시꽃 세 뿌리를 내려놓으며 벼슬 붉은 장닭 넣고 삼세번만 고아 먹어라/ 서둘러, 꽃 지기 전에/ 그래야 약발 받는다던 그 시어머니다.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신화 때문인지 제주도는 모계사회의 전통과 함께 여신 숭배의 풍습이 남아있다. 그런 이유로 해마다 여름이면 할망당에 비손하는모습으로 피어나는 접시꽃빚쟁이처럼/ 여전히 따라다니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의 불도장이다. 그래서 이제는그 기억을 그만 놓아줘야 할까보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제재로 사용된 흰 접시꽃은 이를테면 아들 낳는 비법들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많이 써왔다고 한다. 접시꽃 뿌리는 촉규근(蜀葵根)이라는 약재로 쓰인다. 동의보감에서도 여성들의 냉, 대하 등 부인과질환에 가루를 내어 술에 타먹으면 좋다고 하며, 옹종(癰腫)과 창독(瘡毒) 등 피고름을 빨아내는데도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접시꽃을 통해 반추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은 복잡다단하다. 내리 딸 둘을 낳아도 괜찮다, 괜찮다 하시던인자함과 흰 접시꽃 세 뿌리를 가져와 아들 낳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시어머니의 전형성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자연의 섭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아로서의 한 여성이 가슴 깊이 봉인된 옛 기억을 털어버리려는 내적 몸부림이 출산의 고통과 남아선호의 불평등을 모르고 자란 남성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권영희 시인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린다. “사려 깊은 사람처럼 속이 꽉 찬 배추와/ 저 혼자 양껏 자란 청무 잎어머니 손맛을 떠올리게 만드는 중요 기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곧 어머니다. 사랑의 베풂이자 그리움의 향기인 어머니의 손맛은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어떤 재료와 어떤 양념이 들어있는지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하루 한 끼를 먹더라도, 깨끗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이 몸과 영혼을 튼튼하게 살찌워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좀 오래 걸려도 집에서 만들어먹는 기쁨이 슬로푸드의 본질이자 어머니 손맛의 핵심이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 손맛을 보며 자랐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어머니 손맛을 시연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릴 적/ 데면데면하던 일들이/ 때로 몹시고파지는 나이 든 현실 앞에서 추억과 그리움을 미어지게한 쌈 싸먹는 시인의 자전적 고백이 뭉클하다. 가장 빠른 길이 가장 좋은 길은 아니듯 가장 비싼 음식이 가장 맛있는 음식일 수는 없다. 가끔은 뜻하지 않은 것들에서 소중한 옛 추억과 조우하는 것처럼 세상은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만 또 다른 세상을 허락한다지 않는가. 그 세상의 경이로움을 보기 위해서라도 추억이라는 시간의 되새김질을 통해 영혼의 속도를 조금만 늦춰 보자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