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문단의 평가

준절한 채찍으로만 겨우 몸을 가눈다 -김일연 (시조 21 (2017 봄호)

설정(일산) 2017. 3. 23. 18:09

준절한 채찍으로만

겨우 몸을 가눈다.

 

- 장순하 구심(求心)최재남 호오이지성찬 雪夜함세린 봄비

 

 

김 일 연 

 

 피아골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하산 길은 비가 오락가락하여 미끄러운 너덜겅이었습니다. 발이 빠른 일행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 고개를 있는 대로 떨구고 엉거주춤 내려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힘들어 보였던지 지나가던 등산객이 한 말씀 해주고 가시더군요.

용기 내십시오. 너무 고개를 숙이지 마시고요.”

……

-’ 하고 속으로는 웃음이 났지만 그 말에 정말 용기를 내어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말끔하게 갠 푸른 하늘이 너무나 청명한 빛깔로 거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네 발로 기다가 마치 처음 고개를 들어보는 첫 인류와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득 생각이 나서 한참 전에 읽었던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다시 뒤적여 밑줄이 그어진 곳을 찾았습니다.

 

오모(인류의 기원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있는 강) 와 같은 바싹 말라붙은 아프리카의 풍경 속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땅에 발을 딛고 서게 되었다. <중략> 사실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직립하여 걷게 되었을 때 인간은 새로이 통합된 삶을, 사지를 종합하는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동물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만 오직 인간만이 창조의 흔적을 남긴다.

 

  그에 따르면 직립하면서부터 인간은 창조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눈부신 창조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건가요. 돌 지나 서고 걸으면서부터 다섯 달 만에 숟가락질을 하고 그림책을 보고 부모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고 율동을 하고 의사표현을 하는 외손녀 해인이의 놀라운 성장 속도를 지금 보고 있기도 하네요.

  중력이 계속 아래로 당기어 할머니가 된 저의 피부와 위장이 쳐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아직 걸을만한 직립인간이니까 해인이를 보려고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가 본 빙하가 만들어 놓은 계곡 요세미티 공원의 나무들처럼 허리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물며 비도 수직으로 서서 죽는데 (허만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말입니다.

 

길이 끝나는 데서

산이 시작한다고 그 등산가는 말했다

길이 끝나는 데서

사막이 시작한다고 랭보는 말했다

<중략>

 

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물냄새를 맡는다

맑은 영혼은 기어서라도 길 끝에 이르고

그 길 끝에서

다시 스스로의 길을 만든다

 

                       같은 시집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길이 끝나는 데서 사막이 시작한다고 랭보는 말했다지만(방랑벽이 있던 랭보는 그의 동성애자인 스승 폴 베르네르와 사막을 여행합니다. 랭보의 이야기는 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에도 잘 나와 있는데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으로 출연하지요.) 저는 길이 끝나는 데서 바다가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라는 말, 그리고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물냄새를 맡는다는 그의 시가 은유하는 것도 절망보다는 희망 쪽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에 더 가까울 것 같기도 하고요.

수직을 사랑한 허만하 시인의 같은 시집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상략>

시인의 언어는 기대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수직으로 선다

중천에 얼어있는 눈부신 햇살처럼.

<하략>

                          같은 시집 장미의 가시· 언어의 가시

 

시인의 언어는 수직으로 선다는 그의 언표처럼 하늘을 향해 오르는 나무로 살다가 비처럼 수직으로 서서 온 길 돌아갈 수 있으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겠다 싶습니다.

 

  지리산은 곳곳에 비경을 숨겨놓고 있습니다. 비만 수직으로 서서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장이 멈춘 나무들 역시 그대로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을 지리산 고사목 숲에서 보았습니다. 고사목 숲의 나무들은 고사한 후에도 이마에는 흐르는 구름을 이고 등에는 빛과 바람을 지고 서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두터운 밀도의 안개가 휘감은 그곳은 가득한 정령들만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아무리 거센 바람이 그 신비로운 흰 구름을 흩어놓아도 이미 죽은 나무들은 그 모든 자연의 흔들림에 초연하더군요. 살아있는 것들은 아주 조그만 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살다보면 하루에도 지옥과 천당을 오가고 돌이켜보면 일평생도 그와 다르지 않는 것이 우리들 약한 인간이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운명입니다.

 

 나의 하루는

 구심하는 팽이 꼭지

 

 반경 안에서는

 태풍이 휘몰아치고

 

 준절한 채찍으로만

 겨우 몸을 가눈다.

                                       장순하구심(求心)

 

  몇 해 전 문학 기행으로 장순하 시인을 뵈러 지리산에 다녀오면서 얼마나한 준절한 채찍으로시인의 삶이 이어졌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조가 참으로 느껍습니다. 채찍으로만 수직으로 서는 팽이의 모습을 보며 다지는 시인의 자기 다짐의 모습이 보일 듯합니다. 필시 태풍이 휘몰아치는 삶이었고 그 주어진 삶의 반경 안에서 하루하루 끊임없이 휘둘렀을 채찍입니다. 주저앉지 않고 몸을 가누어 꼿꼿이 바로 서기위해서 말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수직으로 선다는 말씀을 이 시조에서 참된 언표로 느껴봅니다.

  누구에게도 그러한 채찍은 있을 것이겠지만 과연 저의 준절한 채찍은 욕망을 위한 것인지 욕망을 버리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하였습니다.

  한 이십여 년 전 어느 큰 시인께서 저의 어떤 우문에 이제는 실험할 때가 아니고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때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지만 그러나 창작은 실험이다라고 해주신 장순하 시인의 말씀도 큰 메아리로 와 닿는 것은 아마도 그 말씀을 하실 때에 전해진 진정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곧 법고창신과 같은 뜻으로 들렸습니다. 옛 법을 지키어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은 시조가 받들고 기억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겠지요. 시조의 정형에 대한 믿음 안에 어떤 새로움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이 모든 시조시인의 탐구하는 바일 것입니다.

 

 저토록 너른 바다에

 숨구멍 하나 없어

 

 바닥 깊이 박힌 삶이

 턱까지 차오르면

 

 호오이

 바늘구멍 같은

 천지 다시 뚫는다

 

                             최재남 호오이 - 숨비소리

 

저토록 너른 바다에/ 숨구멍 하나 없군요.

숨비소리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이지만 해녀가 아니었던 저의 어머니도 종종 숨비소리를 내셨습니다. 얼마나 바닥 깊이 박힌 삶이었으면 얼마나 턱까지 차오르는고단함이었으면 그 너른 천지 다시 뚫는보이지도 않을 조그마한 그 바늘구멍 같은소리를 내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바늘구멍 소리가 천지를 다시 뚫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그 소리를 내며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힘을 보아봅니다. 그것이 어머니 세대가 감당해야 했었던 여성에 대한 사회적 구속이나 고난 속에서 터득한 삶의 한 방도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러나 한 번씩 내뱉으시던 어머니의 그 숨비소리마저도 듣기 싫어했던 저였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그것마저도 참으셨을 어머니를 생시처럼 다시 뵙는 것, 그것이 다른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나무들이

 은빛 고운 드레스를

 입는다

 밤을 맞이하는

 가슴은 달아오르고

 외딴집

 작은 불빛이

 금단추를 풀고 있다

                                       지성찬 雪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텅 빈 것 같이 쓸쓸한 날이면 이렇게 어여쁜 시조를 읽어봅니다. 그러면 다시 어떤 정다움과 따뜻함이 저의 쓸쓸한 마음 한 구석을 위로하며 고요히 스며듭니다.

  시들 중에는 깨달음을 주는 시도 있고 놀라운 발견으로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는 시도 있으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훌륭한 시들도 있지만 내게 정녕 위안을 주는 시, 나를 빙그레 웃게 하는 시는 바로 이런 시들입니다.

  놀라운 구도의 시, 남다른 삶의 경험이 있는 시, 어떤 깊은 사유의 시들은 읽을 때에도 그에 걸맞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여 쉽게 접근하기에는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지마는 이런 따스한 어여쁨을 가진 시들은 소박한 들꽃처럼 친근합니다.

 

 봄비가 밤늦도록 처마 밑에 칭얼대고

 

 바람은 소리 낮춰 창문을 두드리고

 

 아득히 멀리 있어도 네 숨결을 보노라.

                               함세린 봄비

 

  지성찬 시인의 작품 雪夜와 함세린 시인의 봄비는 모두 정갈함과 단정한 품격을 갖고 있는 시조입니다. 雪夜가 현대적 느낌이라면 봄비는 고시조 같은 고전적 느낌이 있군요. 고전적 느낌이란 아마도 종장 마지막 구의 어미 노라에 기인한 것 같고요.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이러한 영탄의 어미도 이 작품의 경우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자연과 하나가 된 아름다운 교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요하고 자그마하고 순결하고 소박하지만 서정시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네요.

  사람의 삶이 참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특히 시를 쓰는 일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힘으로 아름다움을 방해하고 억누르며 훼손시키는 것들의 부당함’(문광훈 교감 천천히 사유하는 즐거움」』) 이 엄청나게 자행되고 있는 것과 같이 시의 이름으로도 참된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얼마나 많은 치장된 아름다움이 범람하는지요.

그 무엇도 신화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실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라고 문광훈 교수는 같은 책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지만 모든 허세와 과장을 벗고 그 무엇도 신화화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미의 변증법을 사실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시를 사랑하는 첫걸음이라고 바꾸어도 될 듯합니다. 미의 변증법을 소박하게나마 작품과 함께 풀어보는 일은 숙제로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