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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시인의 시 <혼자 사는 어머니>외

설정(일산) 2009. 8. 25. 20:21

 

 

 

이생진(李生珍) 시인

출생
1929년 10월 1일, 충남 서산시
학력
국제대학 영문과
수상
2002년 상화시인상 수상
 
 

혼자 사는 어머니

 

         이생진

 

 

나이 70.
1929년생
일제 강점하에 태어난 것도 얼울한데
말년엔 남편 중풍으로 쓰러져
3년 동안 간병하느라 다 죽어가던 세월
영감을 산언덕에 묻고 나니
휘휘 방안엔 찬바람만 그득하다고
그래도 아침엔 동백꽃처럼 단단하다가
저녁엔 호박꽃처럼 시들해진다며
아랫목에 누울 무렵
뭍으로 간 자식들에게 전화가 온다

"어머니 저예요"
"음 부산이냐"

"어머니 인천예요"
"음 너냐"

"어머니 안양예요"
"음 애들은 잘 놀고"

"어머니 저예요"
"음 목포냐"

그 다음엔 산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바위를 치는 갯바람 소리
그 밖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방
문풍지 우는 여서도
나이 70.
아직은 차돌같이 강하다만
"음 걱정 마라"
막내의 전화를 끝으로 자리에 눕는 어머니

여서도에서 태어나
함께 초등학교 다니던 남자를 부모가 맺어줘
아들 다섯에 딸 하나
부산으로 인천으로 목포로 안양으로
다 내보내고 섬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
"음 걱정 마라, 나는 예가 좋다"

 

 

아내 모르게

 

나는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나는 이런 데 오면
엉겅퀴가
패랭이가
민들레가
갯쑥부쟁이가 좋아 아내를 잊는다

또 아내 모르게 하는 소리인데
용암석에 부딪치는 파도며
뿌옇게 드러낸 톳과 가사리를 보면
아내를 잊는다

 

 

커피와 맥주

 

커피는 절대 금한다고 하고서
마라도에 와서는 커피부터 마신다
오전인데 세 잔 채
그만큼 마라도의 열기는
나의 굳은 서약을 파기한다

사적으로는 아무리 금주령을 내렸다해도
마라도 도착 즉시 마시는 것은 맥주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신다
그래야 바다가 내게 가까이 온다

 

시인의 날개

 

조물주가 시인을 만들었다면
시인의 언어에만 날개를 달지 말고
시인의 양쪽 죽지에도
날개를 달아줄 일이지
그땐 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겠는데
섬에 오면 정말 날개를 달고 싶다

 

 

갯쑥부쟁이꽃

 

 

식물도감을 보면
긴털갯쑥부쟁이는
11월에서 다음해 2월까지
제주도나 그밖에 남부 지방 해변에서
피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라도 풀밭에는
9월 화창한 가을 문턱에 피어 있다
이놈이 날 반기느라
도감을 이탈한 것인가
그 이탈은 참 예쁘다
민들레와 엉겅퀴는 사별을 하고
너는 혼자 살아도 예쁘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혼자서 파도 소리 듣는
네 귀가 예쁘다

 

 

미친 소리

 

어느날은
바다를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었고
어느날은
바다를 오징어처럼 찢어먹고 싶었다

 

바다와 나비

나비야
너는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초면

 

 

잔디밭에 앉아 수평선을 보는 사람보고
"고기 많이 잡으셨어요?"
삼십 대 단발머리 길쭉한 몸매
"낚시도 없는데"
"그럼 섬엔 왜 오셨어요?"
"글쓰죠"
"시요. 소설?"
"시"
"야 멋있겠다 나는 무용인데"
"그럼 고전 현대?"
"현대죠 포스트를 좋아해요"
"멋있겠네"
"그런데 결혼했더니 죽을 것 같아요"
"결혼은 예술의 무덤일수도 있지
그 무덤을 깨고 나오려면 화산처럼 폭발해야 하는데"
"제 이름은 김자 화자 순자 선생님 시집은?"
"성산포, 그리운 바다 성산포"
"아 바로 그 분이시구나! 저 그 시 좋아하는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슴
"무용도 시죠 몸으로 읊는 시"

 

 

바람 같은 얼굴

 

오늘 수평선은
네 눈썹처럼 진하다
너도 네 눈썹을 갈매기처럼 그리지 말고
수평선처럼 그려라
그러면 네 얼굴도 바다가 되리라

 

 

마라도의 신

 

너는 바람을 얼마나 아느냐
마라도에 가기 전에 바람을 알아라
바람 부는 속사정
마라도에 가려거든
미리 가 있는 바람을 알아라
바람은 마라도의 신
그리고 무서운 주권
너의 모든 것은
바람이 쥐고 있다

 

수평선상의 연인들

 

수평선을 배경으로 손잡고 오는 연인들은 멋이 있다
한 쌍의 물새 같다

 

 

수평선으로 시작하는 아침

 

문을 열면
저 구름
저 수평선
저것이 밥을 주는 것은 아닌데

집을 나서면
저 구름
저 수평선
저것이 옷을 주는 것도 아닌데

 

 

원근법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을 보다가
음악을 듣는다
컴퓨터에 이어폰을 꽂고
고흐의 ‘슬픔’을 보면서
돈 매클린의 ‘Vincent’를 듣는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고흐가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는 소리에
이어폰을 뽑고
‘아니,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피아노 레슨까지?
고흐는 무식하지 않았구나’ 하고 놀란다

악기의 음계와 화구의 색조 관계가 알고 싶어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는 고흐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밀레의 격정이 있고
디킨스의 소설에는 원근법이 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렘브란트의 숭고함이 있다며
배고픈 머리를 끄덕이던 고흐에게
나는 나의 머리를 숙이고 다시 이어폰을 꽂는다

(돈 매클린의 ‘Vincent’)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they will의 약자에 ''가 두 개인 것은 컴퓨터의 잘못임)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온전한 정신을 가지려고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지요
아마도 지금은 귀를 기울일 거예요)

지금은 모두들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참고>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고흐, 37년의 고독』(큰결.2004) 1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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