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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진의 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3/4/5월호, 스토리문학 2009

설정(일산) 2009. 9. 6. 15:14

 

 

<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2>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 권순진

 

지난 한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미친 소와 수입 쇠고기에 대한 기억이 명료한데, 지난 연말 상영을 시작하여 최근까지 관객몰이를 지속하고 있는 한 다큐영화에 등장하는 늙은 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과 소 사이에 길게 가로놓인 숙명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새벽에 내리는 눈처럼 가지런하게 다 내릴 때까지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란 송시가 가슴 속에 무겁게 박혀 도무지 발딱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일어서 햇빛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날 작은아이의 생일이라며 끓인 쇠고기 미역국을 밀쳐내며 애써 소 한 마리를 지우고 있는데 이성목 시인의 ‘다우너’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 시와 함께 몇 편의 시를 그 불연속선 위에 놓고 불연속성 단상을 개입시켜 보았다.

 

 

다우너 / 이성목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소가죽인데도 뒤축이 너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갈 시간이 없다.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2월호-

............................................................................................................................................... ‘다우너’라는 정겹진 않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단어와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에서 지난 해 보았던 도축장 앞의 풍경을 담은 한 외국 동영상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전 국내에서 주저앉는 젖소를 불법 도축해 유통시킨 일당이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바도 있다. 기립불능의 젖소를 제때 신속하게 브로커에게 넘기지 않으면 농가에서 죽을 수 있다. 죽게 되면 농민들이 자비를 들여서 매몰처분 해야 되는데, 돈을 주고 사가려고 하는 브로커에게 소를 넘기는 것은 어쩌면 이 불황의 축산농민들에게는 안 되는 일이기는 하나 가능한 선택이기도 하겠다는 동정심마저 든다.

소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동물 중 하나다. 도축장에 끌려 들어가기 전에 발버둥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살아서 인간을 위해 바친 시간도 모자라 도륙되어 온몸이 찢기어 팔려나가는데 고분고분하기만을 바란다면 너무 몰인정하지 않은가. 도축도 전에는 망치로 양미간 급소를 단 한방에 쳐서 기절시킨 후 목을 따서 피를 빼고 해체하다가 최근엔 망치를 사용하지 않고 전기충격을 사용한다고 한다. 근육이 경직되어 고기 맛이 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게 해주자는 자비로운 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소의 입장에서는 개나 닭이나 다 웃을 노릇이다.

옛날 초등학생 시절 고래는 버릴 것이 없다고 배웠는데 소야말로 버릴 것이라고는 하품 밖에 없는 가축이다. 하지만 소가죽 구두의 뒤축은 사실 소의 피륙은 아니다. 뒤축이 무너진 구두에 새 징을 박아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재촉에서도 우리는 소를 떠올린다. 그러나 소의 노동을 사유하지만 인간이기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숭고함으로 귀결된다.

나는 문득 여중생 집단으로부터 시작된 청계광장의 촛불들이 소를 귀하게 여기고 소에 대한 애정과 우정이 충만한 ‘친소적’ 사람들의 무슨 ‘소권’에 대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라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 촛불의 관심과 소망은 오로지 맛나고 질 좋은 고기를 먹어야겠으며, 여기에 안전한 고기를 먹고 말겠다는 끈끈한 육욕이 덧붙여져 도드라져 보일뿐 그들의 외침은 인간과 소에 대한 본질적인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소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없었다. 이토록 인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제한적이고 이기적인가.

그리고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갈 시간이 없다’는 진술이 인간의 사악함을 재촉하는 듯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이 구분된다면 우리 인간의 문화는 어디로 가야하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기에 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작품이기에 악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칸트의 말이 또 다른 의미로 환기된다.

 

 

서울에 사는 소 / 김륭

 

1

소(牛)를 키운다. 아파트 거실에서

밤마다 정육점 갈고리에 매달리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몸서리치는

소.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아이가

소를 등지고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다.

우우 눈(目)으로 우는

소.

 

운동장만한 아파트가 고향집 외양간보다 불편한지

워워, 틈만 나면 슬그머니 집을 나가는 소.

지하 주차장이나 놀이터를 갈아엎어 아내 얼굴에 똥칠을 하는

우리 집 소는 뿔이 없다.

서울로 끌려오면서 팔아치운 논밭뙈기 그리운 날이면

사거리 맥도널드 체인점 앞에 모락모락 소똥 퍼질러 놓는다.

그때마다 난리가 난다.

어이구, 못살아 내가 못살아! 제발 집안에 편히 계세요

아내에게 사랑받는 우리집 소는 음매음매

자주 아프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등골 빠질 만큼 실컷 부려먹은 소, 당장 도살장으로 모셔야하지만

아내는 애완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2

아버지 참 눈치도 없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가 헬스클럽에서 돌아왔는지 모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거실 소파에 소똥 퍼질러 놓고 있다.

 

- 2005년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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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노동은 농사이며, 그것을 업으로 하는 농부는 가장 깨끗하고 당당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가장 기피하는 직업이 된지 오래다. 시골에서 붙여먹던 논밭뙈기 팔아치우고 ‘서울로 끌려온’ 아버지는 벌집 같은 아파트에서 영락없이 ‘애완용’ ‘소’가 되어버렸다.

농업을 천형으로 알고 살아온 한 노인과 그 천형의 길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우직하게 함께 걸어온 한 '늙은 소'가 애틋한 몸짓으로 교집합 되더니 결국 하나의 모양으로 합집합 되는 양상이랄까. 영화 ‘워낭소리’에서 자식들의 강요에 의해 노인이 마지못해 늙은 소를 우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자 소가 흘렸던 것과 같은 눈물을 아버지도 흘렸을 것이다. 늙은 소가 흘린 눈물의 의미가 평생을 바쳐 함께한 노인네를 떠나야만 한다는 이별의 서운함 말고도 처절하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눈물의 성분도 포함되었다면 아버지의 눈물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농사를 접고 소를 팔아치우고 이제 스스로가 굼뜬 애완용 소가 되어버린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 역시 소통은 소똥이다. 소를 키우듯 농사를 짓듯 그렇게 자식농사까지 다 지은 마당에 당신은 모든 가치를 상실한 도살처분 직전의 소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보아하니 자식들이 예의는 차릴 줄 안다. 팔리지 않을 값으로 할아버지가 소와의 우정을 과시했던 것처럼 자식들도 내다버리지 않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애완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 노인네가 그래도 갸륵한 것은 가끔씩 외국산 쇠고리로 만든 햄버거를 먹을 때 우우 우는 것이나, ‘사거리 맥도널드 체인점 앞에 모락모락 소똥 퍼질러 놓는’ 일 정도인데, 이 대목에서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스쳐지나간다.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왜 물컹한 것들도 명상의 대상에 포함시켰을까? 전통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들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인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에 속해있다는 말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예속이 되었다는 견해인가? 그래서 마요네즈와 브라운소스의 입맛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좋다는 건가 나쁘다는 건가? 냉소적 어투로 보아서는 분명 일종의 비판과 조롱이 묻어있긴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이 초국가적 브랜드들이 지배하는 현실을 벤자민 바버 교수는 ‘맥 월드(맥도날드가 지배하는 세계)’란 말로 표현은 했지만 설마 쇠고기 한 조각으로 '팍스아메리카나'를 꿈꾸기야 하겠나.

 

 

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시집 ‘십이음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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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안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읽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면 일단은 좋은 시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가슴에서 알싸한 바람이 일거나 명치끝이 아리거나, 좌심방 우심실이 데워진다면 성공한 시라 해도 무방하겠다. 게다가 의미 연결이 탄탄하고 짧게 농축이 되었으며, 다시 찾아 읽고 싶은 밑줄 쳐진 시라면 아주 잘 된 시라고 보아도 되겠다.

1960년대 말에 쓰진 김종삼 시인의 묵화가 바로 그런 시의 모범이 아닐까 싶다. 삶의 노고와 적막이 녹아있는 풍경을 단색의 묵화로 깔끔하게 그려냈다. 묽고 진한 먹물과 굵고 가는 붓놀림만으로 한국적 아름다움과 품위를 획득한 그림이 선명하다.

멀뚱한 눈망울, 자존심처럼 세운 뿔, 굵은 목덜미, 바위산의 능선 같은 등, 빵빵한 체통으로 그려지는 소는 농촌에서 가족과 같이 친근하고 귀한 가축이다. 언젠가 꿈 해몽 책을 보았더니 소는 집안 식구, 협조자, 집, 재산 등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나와 있었다. 당연한 은유다. 특히 그 눈망울은 삶의 깊은 시름 가운데서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온유하다.

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라 하여, 인간사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며, '마음'을 찾아가는 행로를 '소'를 찾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의 절제된 언어가 소와 할머니와의 따스한 교감을 넘어 득도의 적막에까지 이른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소의 눈망울은 서로 다 알고 있다는 듯 손이 얹어지는 것으로 그 뿐, 고개 끄덕일 필요도 없이 적요하다. 김기택 시인도 ‘소’라는 시에서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최근의 다큐 영화 '워낭소리'는 이 ‘묵화’의 영상버전이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동행이라는 묵직한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쌔빠지게 일만하다 늙은 소 한 마리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간 투명한 눈물과 볼그족족한 눈시울만으로도 그 값어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겉으로 흐르는 메시지는 자신들의 삶에 있어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충직하기만한 인간과 소 사이의 애틋한 사랑과 우정이겠으나, 온전히 소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과연 그것만이 다일까’ 라는 생각이 미친다. 코뚜레가 꿰어지고 워낭이 목에 달리는 순간부터 시작해 끝내 늙어 일어서지 못할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를 준다. 죽어서까지도 꼬리뼈와 발가락 하나, 가죽껍데기 한 조각마저도 남김없이 다 주고 간다. 만약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 뻔뻔하지 않을까. 소의 가치가 ‘일’도 아니고 오로지 ‘고기’로만 전락한 이 시대에 ‘워낭소리’에서도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인간과 소의 관계를 우리들은 다시 새겨 읽어야하지 않을까. 이유가 무엇이건 올 기축년 소해에 소 때문에 지랄 같았던 지난 해 몇 달 동안 그들에게 참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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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3>

바다가 시인에게 들려주는 말 권순진

 

바다는 장님 앞에 버티고선 코끼리다. 눈 빤히 뜨고도 자기 눈으로 만지고 더듬은 만큼만 볼 수 있고, 그만큼만 보여주는 바다는 거대한 코끼리다. 같은 바다라 해도 동해와 서해 다르고 태평양과 지중해가 다르다. 아침바다와 밤바다 그리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같지 않으며, 계절마다 달라지는 게 또한 바다다.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바다의 의미는 달라진다. 해안선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과 섬에서 보는 바다의 차이는 크다. 영화 ‘그랑 블루’의 바다 속 풍경이 있는가하면 ‘타이타닉’의 바다도 있다. 또 스무 살의 바다 다르고 마흔에 보는 바다가 다름은 자명하다. 모두 보이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만 느낄 뿐이겠지만 바다는 물론 보편타당한 공통의 미덕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평원에서만 살다가 이십대 중반에서야 처음으로 높은 산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만약 수십 년을 바다 구경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생애 처음으로 바다 앞에 섰다면 그 느낌은 어떠할까? 당연히 톨스토이의 충격에 버금가는 강력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파블로네루다를 모델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에선 마리오가 섬을 떠난 네루다에게 들려주기 위해 바다를 녹음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 '칼라 디소토'의 파도소리, 둘, 큰 파도소리, 셋, 절벽을 쓰다듬는 바람소리...

우리는 가슴이 답답하거나 누군가의 위안이 필요할 때, 그리고 삶이 흔들릴 때 자주 바다를 그리워하고 찾는다. 특히 고향에 바다를 두고 왔거나 깊게 아로새긴 바다의 추억을 품은 이에겐 더욱 그렇다. 김춘수 시인은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또한 회복이고 부활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여자의 음부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로 곧장 바다가 연상된다고 했다. 모태 속 양수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 탓일까. 확실히 바다는 인간에게 위로와 안식으로 기능하는 유익함이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바다의 의미는 보통사람 보다 더 강열하고 각별한 것일까? 바다의 에너지를 시적 에너지로 전환 충전할 수 있을까? 뚜껑 열린 날 것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의미망 안에는 어떤 게 존재할까? 시인은 바다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바다는 시인에게 무얼 가르치며, 시인에게서 바다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바다로부터 초대를 받은 몇 명의 시인에게서 어디 한번 들어보자.

 

 

바다에서 시인에게/ 이영식

 

파도가 바위를 친다

함묵의 북, 두드려 억만년 잠 깨우려 한다

저를 허물고 바람을 세우는 파도

낮고 낮아져 모음만으로 노래가 되는 시를 쓴다

 

시인이여

바다라는 큰 가락지 끼고 도는 푸른 별에서

그대, 시인이려거든

바다 건너는 나비의 가벼움으로 오라

비유로 말고 통째로 던져 오라

애인이자 어머니이며 삶이고 죽음인

바다를 사랑하라

근원에서 목표까지 온전히 품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정신을 적시는 바다

모래톱에 밀려온 부유물들을 보라

모든 것 다 받아준다고 바다가 아니다.

(이하 생략)

 

-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3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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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파도는 해안을 향해 삼킬 듯 저돌적으로 밀려오지만 늘 그렇듯 그 힘만큼 뒷걸음질 치며 밀려 나간다. 안용태 시인의 ‘몽돌’이란 시에서처럼 ‘그렇게 치고도 지치지 않는 너도 너지만 그렇게 맞고도 물러서지 않는 너는 또 무어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이.우.에.오. 거친 숨 휘몰아치며 웅크린 나를 향해 파도는 연이어 소리치는데 바람의 냉기만이 자욱하다. 그때서야 ’낮고 낮아져 모음만으로 노래가 되는 시를‘ 본다. 삶 또한 그런 것.

‘바다라는 큰 가락지 끼고 도는 푸른 별’ 지구에 시인은 미세한 점 하나로 서있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 물결에 절어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지만 나비처럼 두려움 없이 오라. 그 ‘가벼움으로 오라’ 계산도 말고 ‘비유로 말고 통째로 던져 오라’ 껍데기는 남기고 알맹이만 오라고 바다는 말한다. 애인도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도 그리 말씀하신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삶을 망라한 바다는 시인에게 홀딱 벗고 오라 한다.

성산포 시인 이생진은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고 했고, ‘봄바다’에서 김춘수 시인은 ‘모발을 날리며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고 섰다. 눈보라도 걷히고 저 멀리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인간의 여자가 탄생하는 것을 본다’고 노래했지만 어디 그게 성산포 앞 바다만의 포용이고 시인이 본 봄바다만의 일출이겠는가. 미세한 각론의 차이는 있겠으나 바다의 역동성과 건강성 그리고 담대함은 어느 바다나 갖춘 미덕이며, 언제나 그 미덕으로 시인의 거친 호흡들을 덩어리째 수렴한다.

 

 

큰 그릇-바다11 / 최동룡

 

자정(自淨)의

이마를

바윗돌에 간다

 

흰 피를 다스려

맑아지는

물그릇을 본다

 

철썩!

따귀를 맞는다

내가 시퍼렇게 정신이 든다

 

- 시집 『울릉도로 갈까나』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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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에 서서 내 쪽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감상과 바다 한가운데 섬에서 바위를 때리는 파도를 볼 때의 느낌은 같지 않다. 그것도 바위 가장자리에서 파도의 물보라가 사정없이 뺨을 때리고 바다비린내 물씬한 산소를 큰 호흡으로 들이킬 때 '맑아진다'라든가 '정신이 든다'란 진술은 오히려 지극히 직설적이다.

큰 그릇의 상대어는 작은 그릇이겠지만 '찻잔 속의 파도'란 말과 함께 얼른 찻잔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당연히 큰 그릇의 파도는 그 '찻잔 속의 파도'와는 대비 개념이다. 통 큰 바다란 말이겠다. 안도현 시인은 ‘고래를 기다리며’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라 했다. 기다림은 자기를 다스리는 일이고, 그 다스림은 그물이 되어 거물을 건져 올린다.

스스로 이마를 바윗돌에 부딪치며, 철철 넘치는 흰 피 다스려 스스로를 정화한다. 기장미역의 맛이 좋은 건 그 지역의 물살 때문이다. 강한 계절풍의 영향으로 조류의 상하유동이 좋아 질이 좋고 병충해의 피해도 적다. 쫄깃한 맛도 요동치는 그 물살 때문이다. 생선도 마찬가지며 대부분의 해산물이 그렇다. 그런 물살과 파도가 없는 바다는 당연히 건강하지도 맑지도 않아 그 속에서 온건하게 자란 해산물은 우리 입맛에도 떨어진다. 사람들이 자연산을 고집하고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각설하고 시인은 그 파도에 철썩 따귀를 맞고 시퍼렇게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탁월한 효과의 각성제를 복용했으니 선구안 좋은 시인은 곧장 이것을 단출하지만 힘 있는 한 편의 시로 풀었겠다. 이렇듯 시인은 큰 그릇에서 배운 바대로 자정의 이마를 바윗돌에 열심히 갈기도 하고, 쫄깃한 자연산 시의 맛을 내기 위해 스스로 몸을 비틀며 물살을 만들기도 한다.

 

바다경전 / 박창기

 

뭍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 바다로 달린다. 뜻도 모르면서 바다경전에 푹 빠져서는 읽기만 했었던 나에게 최초의 시는 바다였다. 온몸으로 읽는다고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만에 찌든 허상에 매달려 있을 때 파도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나를 보고서는 경전의 가장자리에서 헤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 준 것도 파랑이었다, 파랑은 바다만이 뱉어내는 언어, 그 언어의 속살과 갈비뼈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슬 퍼런 채찍을 들었지만 외면한 쪽은 나였다. 만신창이가 된 이즘에 와서야 바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바람은 나보다 경전을 더 잘 읽었다. 바람은 파랑을 수도 없이 데리고 경전의 구석구석을 다독이듯 읽었다.

그 큰손으로 바다를 다루는데 파도 같은 경전이 어쩌지 못하는 걸 보면 보잘것없는 나를 변화시켜야한다는데 동의하고 만다. 겨우 몇 장의 경전을 넘겼을 뿐인데 심연의 끝장을 넘기기까지는 몇 번의 허물을 벗고서야 다시 나게 될지 이즘 해변에 서면 파랑이 남긴 언어의 파편을 줍는 것이 고작이다. 유년의 빛바랜 꿈이 잠들어 있는.

 

- 시집 『바다경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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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은 23년간 자기를 키운 게 팔 할은 '바람'이라 했지만 시인에겐 반세기 넘도록 그의 시심을 일군 경작지는 ‘바다’이다. 미당의 어투를 빌자면 어떤 이는 바다에서 당당함을 읽고 어떤 이는 바다에서 용기를 읽고 갔으나 시인은 젊은 시절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겸손을 뒤늦게 읽은 듯하다. 그래서 박창기 시인을 가까이서 보면 당당함과 순수함이 한 몸 안에 고루 섞여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정신 아니고는 ‘詩하늘’이라는 대가없는 시 운동을 14년째 하고 묵묵히 열권의 시집을 묶어 스스로 시의 생활화로 용맹정진 할 수 있었겠나 싶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묻힌 어느 주교의 무덤 앞에 적힌 유명한 비문이 있다. "내가 젊고 자유로울 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불가능했다. 황혼의 나이에 이르러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으나 그마저 허사였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달았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변화시켰다면 그걸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적어도 시인에게 깨달음의 시점은 이 보다는 훨씬 앞선 것 같다. 깨달음의 영어 표현은 '밝아짐(enlightenment)'이다. 시를 쓰는 목적 가운데 하나도 이 ‘밝아짐’이다. 시로 꿈꾸는 아름다운 나의 세상이다. 이성복 시인의 ‘바다’에서는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라고 했다. 때로는 이렇게 서러움의 눈물로 삶의 간을 맞추어야할 때도 있으리라.

앞으로도 파랑주의보가 수십 번 더 발령되고 바람은 늘 속독으로 앞질러 경전을 읽어가겠지만 꾸준한 자기갱신과 겸손으로 바다 앞에 선다면 세상은 조금씩 밝아지리라 믿는다. 그 믿음은 또한 수없이 바다 앞에 서서 바다의 자초지종을 요약할 모든 시인들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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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4>

당신이라는 이름 권순진

 

사랑은 두 눈 부릅뜨지 않는 것. 처음일 때 그러했듯 늘 그윽한 눈빛 되어주는 것. 사랑이란 어쩌면 불량배들이 맹신하는 의리 같은 것. 적당히 굽혀도 좋을 인사를 두 손 모으고 허리 직각으로 꺾는 것. 그리고 사랑은 지지하는 것. 기어이 붓 뚜껑으로 그대 이름 앞에 붉은 도장 찍는 것. 찍고 또 찍어 너덜너덜한 일수 아줌마 수첩 같은 것.

그리고 품속에 꼬옥 간직할 것. 가끔 펴보면 온통 당신이라는 이름 밖에 없을 것. 사랑을 다 탕진한 뒤에도 심장에 쓸쓸히 고이는 쇳가루 같은 것. 한 발짝도 발을 뗄 수 없는 탕아로 그대 뒤에 서서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당신의 이름. 당신이라는 이름...

 

 

당신, 땅거미처럼/ 함성호

 

눈처럼 내리는 당신 생각

피하지 않아도 젖지 않는 저녁이 오네

그냥 비인 그물에 걸린 물방울처럼

송이송이 빠져 나가도록

두네

 

저녁이 오면 서산그림자가

대지를 쓸고 발밑을 지나 바다로 떨어지듯

파도치는 절벽 끝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버리고 가는 당신

 

당신-나를, 인적 없는데 나리는 폭설처럼

자꾸자꾸 쌓이어 어쩔 수 없는데서

덮어버리고

당신-나를, 온 곳에 있는 달처럼

가릴 것 하나 없는 초원 한가운데

홀로 있게 하네

부끄럽네, 마시는 물속에 잠겨있는 당신은 생각은

해안을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그립고

갯벌을 핥고 오는 밀물처럼 사무치네

 

- 월간 ‘스토리문학’ 2009년 4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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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그립다면 그만인 것을 시인들은 무슨 유별난 정서가 있어 이렇게 말을 돌리고 보태고 굴리는 걸까. ‘눈처럼 내리는 당신 생각’의 하염없음으로 애틋함의 수식이 더 필요했다면 보고 싶어 미치겠다. 사무치게 그립다 정도의 표현으로도 다 알아들을 텐데 어찌 긴 말이 더 필요했을까.

유안진 시인은 ‘말하지 않은 말’이란 시에서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 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 사류로/ 오염될까 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 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 도무지 ‘사랑한다’란 말을 쉽게 뱉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 말의 금을 따져보면 도무지 쉽게 말해버릴 수 없단다. 헤프게 보일까봐 아끼고 참아내고 싶다고 했다.

시인에겐 보고픔과 그리움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런 짭쪼롬한 말은 골백번 들어도 좋다지만 그동안 우린 너무나 쉽게 말해버려 그 말의 제 값이 인플레 된 세상에 살고 있기에 자칫 싸잡아 헐값에 매도될 수도 있겠다. 그게 싫은 게다. 그런 현실이기에 싸구려로 보이고 싶지 않으며, 범속한 당신으로 전락될 수 없는 특별한 ‘당신’이기에 나만의 목소리로 ‘당신’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 흔하디흔한 그리움과 사무침과는 변별되어야할 너, 그대, 그리고 당신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누구나 채울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움은 아무나 채워주지 못한다고 했던가. 외로움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브랜드만이 유효한 ‘그리움’이기 때문이리라.

 

 

토막말/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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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아름답게 보일 요량으로 부러 시어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는 더욱 없다. 그 시어가 시의 맥락에 얼마나 충실히 기능하느냐가 관건이겠는데, 시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뱅뱅 겉도는 미사여구 보다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 시펄"이란 막말 한 토막이 ‘손등에 얼음’처럼 더 저릿하다. 더구나 보고 싶은 당신 이름을 부르는데 굳이 폼을 잡아야 하고 목청을 가다듬어야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성층권에서나 내려다봐야 읽힐 정도로 대문짝만하게 쓰진 모래 위 글씨는 마치 외계인과의 내통을 위한 나스카 유적의 기호처럼 은밀하다. ‘정순’이란 여인은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동선을 잃어버린 옛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왜 철지난 바다에 홀로인지, 모래 위에 대문짝만한 토막 글씨를 썼는지, 누가 읽어줄 것인지 불가사의다.

그래서일까, 막말이 이리 ‘대책도 없이 아름’답다. 오히려 무식한 건 저만치서 번득이면서 달려오는 밀물이다. 투박한 한 사내에게서 아픈 마음을 쏟아내게 하고 떠난 ‘정순’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에서 외롭고 쓸쓸한 사내의 마음을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 저녁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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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무리 뜨겁고 집요해도 그것이 완전 연소된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배척당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물렁한 장소가 갖는 배타적인 습성이다. 그래서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어디서나 유통되고,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착한 당신’ 그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만은 한 사내에게서 어찌 바람의 전설로 영원히 남지 않으랴.

가지 떠난 마른 잎들이 허공의 빈 곳을 두리번거릴 때쯤에야 비로소 나는 외로운 척 할 것이다. 그대 부정맥을 앓고 있는 종아리 사이로 노란 모래 바람이 지나갈 때에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연립주택의 옥상 위에 걸린 흰 빨래가 신들린 무당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일 때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 될 때면 나도 외로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사무치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잘가거라 '착한 당신'할 것이다. 봄나무 작은 나뭇가지 하나 소리 없이 꺾을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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