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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바다-나의 비밀스런 시창작노트-박희정

설정(일산) 2009. 9. 6. 15:19

- 나의 비밀스런 시창작 닐레이<3> -

 

모슬포 바다

박희정 (시인)

 

제주도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도시 같다. 제주를 찾는 사람도 그런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닐까. 작년 칠월부터 남편이 제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남편은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새로운 골프장을 조성하면서 클럽하우스를 시공하기 위해 그 곳에 갔다. 이미 많은 골프장들이 조성되어 있어 제주는 새로운 레저산업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 금악리 산자락에 골프장과 클럽하우스가 조성 중이다. 낮은 구릉에 넓게 즐비한 홀과 주변 전경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 속에도 한껏 여유롭게 다가왔다.

남편과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후부터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그리움은 나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쓸쓸하게 지낼 때가 많다. 그저 여행 삼아 다녀오던 제주에서, 남편이 일을 하며 한동안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기쁨 반, 부담 반의 시간이었다. 그런 도시에 내 그리움의 대상, 남편이 살아가고 있다.

작년 시월 중순 무렵, 가을로 몸살을 앓을 때 제주도에 갔다. 들뜬 마음으로 이틀 간 여유롭게 드라이브했다. 오름과 농원과 바다를 향하며 슬몃슬몃 하늘을 본다. 그리움의 대상을 하늘만큼, 땅만큼의 거리로 비유한다면 그날은 바다만큼 넓다고 하고 싶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부부이고 싶었다.

함께 모슬포 바다를 바라 본 기억이 가물하다.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 썰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텅 빈 바다, 곧 넋두리를 퍼부을 듯한,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듯한 가을바다를 보며 한참동안 부재의 시간을 메우느라 마음을 졸였다. 모슬포 바다는 짠하다. 마치 서성대며 사는 우리를 이해하듯 그 가을바다도 무척 적적해보였다. 바다를 두고 우리는 소통의 길을 텄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모슬포는 그 옛날에는 척박한 유배의 땅이었다. 험악한 곳으로 보내지는 유배인들은 대부분 중죄인에 해당되는 인물들로 이들을 격리시키기에 대정마을은 최적지였다. 더불어 모슬포가 있는 대정마을 주민들은 유배인들의 비판적 의식이 주민들에게 동화되어 타지역보다 치열한 삶의 정신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어민들은 어획량도 줄고 농산물도 제값받기 어렵게 되자 모슬포에서 살기 힘들어졌다. 모슬포는 ‘못살포’라고 불릴 정도로 열악했고 힘겨운 바다가 되어갔다.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도, 바다에 안기고 바다에 업혀 사는 사람들도 못살포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2001년부터 모슬포항구에서 방어축제를 하면서 모슬포의 이미지는 서서히 변했으리라. 모슬포 특산물인 자리돔과 방어는 단기간에 많은 양이 잡혀 판매와 수익면에서 효자노릇하며 축제의 주축을 이루는 물고기가 되었다. 해마다 11월 초에 열리는 행사는 청정자연 특산물과 문화유적 관광을 연계해서 흥겨운 마당을 펼친다. 모슬포방어축제를 시작으로 농축산물의 본고장인 모슬포의 명성을 되찾아보자는 의도였다.

내가 모슬포 바다를 찾았을 때는 그런 기미는 찾을 수 없었고 침묵의 시간만 목을 빼고 있었다. 넉넉한 것 같으면서도 부족한, 다 갖춘 것 같으면서도 비어있는 그런 바다를 보며 잠시나마 가을 멋을 낼 수 있었다.

 

목마른 허덕임으로 바다는 널브러져

 

잔기침 삭이더니 미열로 몸부림이다

 

색바람 그예 와서는 잠시 수굿해지고

 

 

파삭한 은모래가 못살포* 흔적 덮었다

 

아리고 쓰린 날들 바람만 웅웅대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돌아서서 흐느낀다

 

 

못내 겨워하며 떠나버린 그 자리에

 

그렁한 사랑같은 가을파도 밀려와

 

모슬포 가장자리는 늦몸살로 또 앓는다

 

* 모슬포 : 제주도 서남단 끝자락에 있는 바다로 과거 사람들이 ‘못살포’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열악했지만 지금은 자리돔과 방어의 어획으로 명소가 되었다.

-「모슬포 바다」전문

 

모슬포바다는 국토 최남단에 위치한 港都로 바람이 가장 심한 곳이며 늘 뒤척인다. 채워져 있으면서 비어있는 듯한, 마치 가을타는 사내처럼 목이 마르다. 저 홀로 잔기침도 하고 열이 올라 며칠 째 몸부림이다. 쏠쏠한 색바람이 불어와서야 비로소 수굿해지기는 하지만 원체 표시나지 않게 오랫동안 흔들렸던 모슬포 바다는 아파도, 더 오래 아파도 티를 내지 않는다.

가만 들춰보면 금방 아픔이 살아날 듯한 바다, 못살포의 흔적이 끝내 사라지지 않았지만 애써 태연하려는 바다, 저 먼 송악산이 배경이 되어주고, 가을 햇살이 또 끌어안아 주는 바다, 갈증의 모래는 거친 흔적을 차곡차곡 덮었다. 그러나 어쩌랴, 바람이 불 때, 모래가 풀풀 일어날 때 아리고 쓰린 날들의 기억들이 자꾸 서성대는 것을. 끝내 절벽과 절벽 사이로 돌아서서 하염없이 흐느끼는 저 모슬포의 날들!

뒤숭숭한 기억과 그렁한 사랑을 보듬고 파도가 밀려온다. 침묵하는 가을바다를 보고 또 몸살을 하는 바다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떠나버린 대상에 대한 아쉬움과 곁에 두지 못한 사랑에 대해 목말라 하며 모슬포 바다는 늦몸살을 앓는다.

사랑하는 사람들, 또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아니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대여 모슬포 바다에 서 보라. 그대의 목마름과 바다의 뒤척임은 미열로 흔들리겠지만 모슬포 바다에 서면, 그대의 늦몸살은 삭아들다 또 들끓다가 파삭한 모래로 스러져 아스라한 성을 쌓을 것이니.

덤덤하게 모슬포와 마주한 시간과 까칠한 기억, 그리고 섭섭한 마음도 다 놓고 그저 바다를 바라 천천히 걸었다. 적이 소원했던 날들과 동동거렸던 날들은 바람에 밀려가고 어느새 저물녘 온기가 스밀 때 그렁한 사랑같은……「모슬포 바다」에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