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문학 2009년 8월호 원고
서정성의 드러내기와 감추기
권 혁 모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속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효용 가치의 여부를 떠나서 논리적인 사회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의 초자아(超自我, superego:생애 첫 5년 동안에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생기며, 부모의 기준과 권위가 내면화되어 있음을 나타낸다)의 감성으로 돌아가 그 심상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솔한 시적 동기가 될 것이다.
폴 발레리가(Paul Valrery, 1871~1945, 프랑스 시인, 비평가) 말한 "시는 절규와 눈물과 애무와 키스 그리고 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 것, 또한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것, 혹은 그런 것을 절조(節調) 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돋보이고 있다.
박영교의 <태안반도에서>와 박기섭의 <벽서> 그리고 박현덕의 <어머니의 겨울>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박영교와 박기섭의 작품이 서정성의 드러내기였다면, 박현덕은 감추기이다. 드러내기와 감추기는 시적 표현을 위한 방법으로 문학적인 완성도와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박영교의 <태안반도에서>는, 이미 폐허가 된 대자연 앞에서 초자아 상태의 감성이 절규하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검은 물 띠를 보면서 한동안 말문을 닫다
죽은 자와 만나는 산자의 마지막 대화
질식한 그대 입에서
거품만이 북적댄다.
죽은 자 입을 열면 산자는 입을 닫다
울음 섞인 파도들은 절벽 앞에 부서지고
눈망울 가득한 눈물
소리 없이 쏟는 외침
바위 틈새 검은 기름 떼 하나 둘 닦아내며
마음속 눈물 되어 절망으로 와서 앉다
목숨도 빛을 잃으면
잦아 우는 저 바람소리.
- 박영교의 <태안반도에서>, ‘스토리문학’ 09년 6월호
끝없이 넘실거리는 은빛 수평선의 서해바다, 울창한 송림이며 기암괴석과 백사장이 원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어야 할 곳-시인은 바로 그 생생한 현장에 와서 한동안 말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있다. 원유로 범벅이 된 검은 바다와 이미 백사장이 아닌 백사장에 와서 상전벽해를 실감한 것이다.
팀 버튼이 감독하고 마크 윌버그가 출연한 영화 <혹성탈출>이 있다. 먼 우주를 향해 떠났던 우주인들은 지구에 불시착하여 원숭이 무리에 쫒기며 방황하게 된다. 그러던 중 모래펄에 묻힌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멸망된 지구를 확인한다. 그들이 통한의 울음을 터뜨리는 명장면이 추억의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지구의 멸망은 아니더라도, 시인은 죽음으로 변한 태안반도 폐허의 현장에 와 있다. 질식한 입에서 거품만 북적되는 생물(그대)과 살아있는 인간(시인)이 마주하여, 이제 곧 생명의 끈을 놓아야 하는 그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죽은 생명이 증언을 하면 인간은 더 이상의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파도마저도 절벽 앞에서 울어야 하는데, 잠시 다녀갈 뿐인 시인은 절망의 눈물과 소리 없는 외침을 쏟고 있다. 그리하여 바위틈에 낀 기름 떼를 닦아내며 폐허의 현장을 치유하기 위하여 헝클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박영교의 <태안반도에서>는 인간이 저지른 대재앙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이를 아프게 지키고 있는 안타까운 시선이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 혹은 환경 보전의 방법과 해답이 아니라, 안타까움 넘치는 절규가 읽는 이의 가슴에 메아리로 퍼지게 한다. 이것이 박영교 작품의 도처에서 만나는 독특한 감성 드러내기이며, 이러한 서정성이야말로 시의 의미에 접근하는 데 수월하게 하고 있다.
박기섭의 <벽서>는 사랑한다는 벽서 문장을 첫수 초장으로 두었다. 조선조 김병연은 음을 읽었을 때 상스러운 말이 되도록 시를 지은 것이 있다. 강원도 원산 근처의 한 서당에서, 선생은 없고 못된 학동들이 김병연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는 비렁뱅이 아니냐고 놀려대는 것을 듣고 쓴 시가 있다.
“書堂乃早知(서당내조지)이고,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같다.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이며, 先生來不謁(선생래불알)이다.” 그 뜻은 “학생은 일찍 앎을 닦았고 / 방안은 모두 귀한 것뿐이구나. / 학생은 모두 열이 안되는데 / 선생은 와서 뵙지를 않구나.”
이렇듯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작품이 도포를 입고 ‘에헴’하면서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쪽이라면, 박기섭의 <벽서>는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존재를 바닥(하류)에 둔 가운데 진실한 사랑을 바라고 있다.
예지야 씨발 나는 죽도록 사랑한다
대못 하나 완강하게 담벼락을 긁어 놓았다 격렬한 못 자국 위로 흙바람이 지나갔다.
나도 그러고 싶다 씨발 사랑한다고
온통 긁힌 채로 찢긴 채로 펄럭거리며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마음 한 폭 걸고 싶다
- 박기섭의 <벽서>, 09년 ‘시조시학’ 여름호
작품 들머리의 “예지야 씨발 나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 속에 숨어있는 사랑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짧은 단 한 마디에 감추어진 온갖 유추가 감정을 찐득이게 하고 있다. 이런 글귀를 대못으로 담장에 긁어 그 위에 흙바람이 지나갔으니, 유추가 가능한 상황은 대충 이런 것일까? 시골에서 많이 못배운 젊은 총각이 이웃에 사는 예지라는 아가씨를 꾸밈 없는 말씨(욕까지도 욕이지 않은)로, 정말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을 소문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 대한 화답은(둘째 수) “나도 그러고 싶다 씨발 사랑한다고”였다. 그 글귀가 온통 긁힌 채 펄럭이며, 어차피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마음이라고 하였다. 뒤집으면, 서로가 서로의 것이 되는 사랑의 마음 한 폭을 걸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 그런 관계, 그런 순수, 그런 젊음! 욕을 하여도 욕이지 않는, 그렇게 마음 가벼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그리하여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받을 것은 없는 그런 예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기섭의 <벽서>는 첫째 수 초장의 벽서에 대한 해답을 둘째 수 초장에 설정하였고, 이에 대한 상황 제시는 각 수의 중․종장을 연이어 한 행으로 두었다. 욕이 섞인 벽서였건만, 그것이 상스러운 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왜일까? 이것이야말로 벽서에서 찾아낸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며 또한 시적 역량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현덕의 <어머니의 겨울>은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의 배를 아프게 한 것이 자식 사랑의 시발점이었다면, 이제는 황혼의 시점인 삶과 죽음의 길목에 있는 어머니를 간호해야 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필자 역시 어머니의 겨울을 지켜야 했던 날이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간호하던 날이 몇 계절이었던가? 지친 새벽에 잠을 참기 위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중환자실과 같은 복도의 신생아실에 갔다. 유리창 너머에선 지금 막 어머니의 이름을 단 신생아들이 바구니에 누워 꿈길 향해 달려오고 있지 않았던가. 만약 나도 너처럼 봄을 베고 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죽음과 탄생의 갈림길에 서서 하염없이 상념에 잠기던 때가 있었다.
“병원 산실 유리창 너머 꽃말을 듣고 있네 / 초롱꽃 민들레꽃 한 아름 받아든 목련 / 전생의 이름표를 달고 꿈길 향해 달려오네 // 나도 너처럼 거슬러 봄을 베고 누워도 / 밀어 보낸 썰물로는 다시 못 채울 그 하늘 / 산과 들 두 손 꼭 잡고 무지개를 바라 섰네 // 단숨에 천지를 얻고 작은 영토를 만들어 / 그 안에 맑은 수액이, 내 안에는 얼마나 있을까? / 해와 달 번갈아 안으며 소나기를 맞고 있네 ” - 필자의 졸시 <산실에서>
박현덕의 <어머니의 겨울>은 어머니를 향한 연민(憐憫)의 정을 감추기 하여, 그 자신은 제 삼자의 위치에서 보다 냉정한 이성을 견지하고 있다.
병실 창 밖 흰 꽃이 피었다가 이내 진다
침대에서 고즈넉이 머리 빗는 늙은 여자
뼈마디 바람 들도록 누가 갉아 먹었을까
저녁 식사 마친 뒤 얼굴을 매만진다
봄날의 앵두꽃을 요염하게 바라보면서
마음은 도시의 밤거리, 신발 끌고 다닌다.
새우 같은 몸으로 어딜 향해 가고 있나
멍든 상처 끌어 올려 꽃 피운 가로등이
자꾸만 기억 들춰내는 치매 걸린 여자 같다.
-박현덕의 <어머니의 겨울>, ‘열린시학’ 51호
박현덕의 <어머니의 겨울> 첫수는 오랫동안 병실 생활을 하며 그래도 여자이기에 머리를 빗는 어머니의 청춘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으로 비롯된다. 그리고 젊은 날의 아리따운 모습을 생각하며 병실을 훌훌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다. 마지막 수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로등에 비유하여 본다. 새우 같은 몸으로 어디로 가려는지, 아픈 상처를 보듬어 기어이 꽃 피운 가로등이, 기억을 들춰내는 치매 걸린 여자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리운 어머니는 이제 새우 같은 몸이 되어 멍든 상처로 꽃 피운 가로등이었지만, 치매에 걸려 헤매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박현덕은 가슴속에 내제된 넘치는 정감을 스스로 절제하며, 슬픔의 상황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과도하게 노출된 서정의 흐느적거림(?)보다는 감추기를 통하여 작품을 더욱 긴장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주옥같은 시조는 수와 수, 장과 장, 구와 구의 적절한 놓임과 건너뜀을 요구한다. 시조와 자유시의 변별력은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형성의 구조는 물론이겠지만, 분명한 건 장을 구성하는 행간의 방법이 등가성(等價性)의 문장 구조가 아닌 반전(反轉)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로 구분되는 한시(漢詩)와, 5·7·5의 3구 17음절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하이꾸에 매료됨은 절묘한 반전에 있다.
자신은 유별나게 시인(?)을 자처하며 글을 발표하고 있지만, 도저히 품격에 못 미친 그런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시적 정감을 담아내는 서정성의 들어내기와 감추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잘 구별하여 독자에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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