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현대시> 7회
바람 바람 바람 권순진
바람은 기후와 날씨를 결정하고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압의 변화에 따른 대기의 흐름을 일컫는다. 즉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기의 이동이 발생하여 두 지역의 밀도차를 없애려 하는데, 이 같은 공기의 이동을 바람이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바람의 사전적 의미는 ‘바람(望, HOPE)’이다. 바라는 일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것 말고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바람의 용례는 또 있다. ‘바람이 나다, 바람피우다’ ‘치마 바람, 자유화 바람이 불다’ 등의 뜻으로 의미가 분화한 경우다.
이 모든 바람은 하나의 세력으로 일순 사태를 평정하고 지배하지만 짧은 기간 지나친다는 통과의 속성을 갖는다. 하지만 사실 바람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하며 머물다가 떠나간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부는 바람이건 바람은 정직하며 아무런 가공과 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다만 거물에 걸리거나 벽에 부딪치거나 다른 기류에 제압당하거나 하여 원색과 원음으로 직송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가끔 눈 부릅뜨고 그 바람 온전히 맞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바람으로 정신의 날을 세워 각성키도 하고 인내를 연장시키려고도 한다. 어느 땐 한 조각의 영혼, 자유, 사랑, 슬픔, 그리움 따위를 그 바람에 실어 어디론가 보내고 싶어진다. 또한 바람 부는 방향으로 무한정 흔들리며 무작정 방랑길에 오르는가 하면, 가지치기 못한 구차한 욕망을 가난한 신앙으로 풍장 치루기도 한다.
굵은 침묵과 맞물린 바람의 깊은 의미는 곧 바람의 전설이 된다. 전설의 커튼 뒤에서 시인은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무엇을 슬퍼하고 못견뎌하는지를 더듬어보자. 바람에 말리고 싶은 영혼의 옷가지는 어떤 것인지, 지금 부는 바람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보자. 그 바람에 편승해 내 사랑은 어디쯤, 어느 바람결에 나부끼는지도 찾아나서 보자.
바람 저편에 서면/ 김춘경
그러하다
바람은 길 끝에서부터 불기 시작하고
바람의 파장이 어깨를 스쳐갈 때쯤
그때서야 비로소
길 위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서로 닿지 못하는 동안의 떨림과
서로 닿았을 때의 흔들림.
그 짧은 교차가 허공을 진동하면
어느새 길은 또 멀어진다
바람이 분다
바람 저편에 서면
지독한 고요함에 슬픔이 밀려온다
- 월간 <스토리문학> 7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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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바람은 자극이다. 하지만 날카롭거나 견고하기 보다는 물컹하다. 물컹하지만 반드시 유순하지만은 않다. 공손한가 하면 옹고집이기도 하고, 완곡히 쓰다듬기도 하지만 각을 싹둑 잘라먹기도 한다. 그리고 머리가 따로 없으니 꼬리도 없다.
몸통으로 넘실대며 내 몸통을 빠져 나가는데, 어깨를 스치는 건 단지 신호일 뿐 유효한 울음은 아니다. 길 위에서 깨닫기로서니 마음보다 피부에 먼저 닿은 것도 아니다. 바람의 중심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바람의 경유지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안부를 물을 수 없구나. 아주 짧은 시간 주파수를 맞추는 사이 또 멀어진다. 부르고 싶은 이름의 한 음절을 미처 부르기 전에 형용하지 못한 고딕의 언어들이 숭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헤진 사랑을 깁을 시간은 어디서도 허락지 않는다.
어느새 길은 또 멀어지고 아득하다. 푸석푸석한 그리움과 부재가 슬픔으로 변주된다. 바람이 지나간 뒤 혼자 길 위에서 중얼거린다. 연결되지 않은 한 문장이 가오리연의 꼬리처럼 노을 속으로 가물가물해진다. 아무래도 바람과 슬픔은 같은 성분인가 보다.
바람을 피우다 / 정끝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기공을 한다 했다
몸을 여는 일이라 했다
몸에 힘을 빼면
몸에 살이 풀리고
막힘과 맺힘 뚫어내고 비워내
바람이 들고 나는 몸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의 몸이 가장 열려 있다고 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닿지 않는 곳으로
몸속 꽃눈을 끌어 올리고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다문 구멍으로
몸속 잎눈을 끌어 올리고
가락을 타며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다면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저기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일 아닌가!
-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2005,민음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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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놀다 들어온 손자의 언 손에 할머니가 호호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때의 입김에는 더운 기운뿐 아니라 할머니의 차원 높은 뜨거운 사랑의 氣가 듬뿍 함유되었다. 이런 氣의 원활한 생성과 소통을 위해 功을 들이는 게 기공이 아닐까 싶다.
이 시는 기공의 요체인 몸 안의 탁한 공기를 토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결국 몸을 헐겁게 만드는 것일 터인데, 느닷없이 그 ‘바람이 들고 나는 몸’의 대가들이 바로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라는 주장을 인용하며 동조하고 있다.
문정희 시인은 ‘러브호텔’이란 시에서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며 온몸이 후들거렸다고 했다. 물론 이 시와는 무관한 함의이긴 한데 어찌 생각하면 아주 상관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작업 공정의 공통점이 있다니 말이다. 나의 마음과 호흡이 혼연히 하나가 되어 나이면서 내가 아닌가 하면, 있는가 하면 없으며, 없는가 하면 있는 또 다른 생명과의 조우이니 말이다.
우리 삶은 그렇게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이완과 고요의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땅을 딛고 있는 하부 구조의 얼쩡거리는 기들을 모아 위로 끌어올리는데 다만 그 위치가 다를 뿐이다. 바람둥이는 배꼽 아래로, 시인은 가슴까지, 수도사는 머리까지 끌어올리려고 애들을 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바람은 한번 피워볼만한 바람이겠다.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 시집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1990,문학세계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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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바람 부는 날도 있다. 낙엽 지고 눈 오는 날이 있으면 모진 바람 차가운 날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바람 부는 날. 일기예보에도 없는 그저 나뭇잎 조금 흔들리고, 길에 버려진 껌 종이조차 몸을 뒤집기는 어려운 날. 그냥 남실바람이 부는 날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내 안에서 부는 소슬바람.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어떤 이는 압구정동으로 차를 몰아가고, 어떤 이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날마다 가고 또 가는’ 길을 간다.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가는 길 험하더라도 내 사랑의 오지인 그곳으로 나는 갈 수 밖에 없으리.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들고 당신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숙명의 외길.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길.
바람으로 인한 미세한 떨림, 진동, 너울 다 홀로 감당하며 혼자 괴롭고 힘들지만 행복해 하며 가는 길. 그 길.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비록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막무가내로 간다. 오체투지로 달려간다.
가면서 시름 다 잊고, 원망의 기울기도 낮추고, 그저 내 마음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당신을 향해 간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나 숨어버리듯 가고야 말 것이리.
그 역에 당도하면 나 혼자만 내려 층계를 뛰어올라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숨이 벅찬 만큼 가슴도 벅차오를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의 가슴 깊은 곳 핵심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괴로움 다 불살라 버릴 것이다. 영원으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문학과지성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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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떠난 마른 잎들이 허공의 빈 곳을 두리번거릴 때쯤에야 비로소 나는 외로운 척 할 것이다. 그대 부정맥을 앓고 있는 종아리 사이로 노란 모래 바람이 지나갈 때에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연립주택의 옥상 위에 걸린 흰 빨래가 신들린 무당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일 때도 나는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 될 때면 나도 외로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사무치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잘 가거라. '착한 당신'할 것이다. 봄 나무 작은 나뭇가지 하나 소리 없이 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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