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 머무는 자
-혜초의 길 18
부처는 스물아홉에 집을 나섰네
집 떠나야 길이 열리고
사람 만나야 사람 만들 수 있고
길 떠나야 사람 사귈 수 있는 것
산과 산이 모여 산맥이 되는 이치나
모래와 모래가 모여 사막이 되는 이치가 어찌 다를까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마을 이루고
집과 집이 모여 도시 이루는 것을
물과 물이 모여 강이 되듯이
별과 별이 모여 밤하늘이 되듯이
늘 떠나는 자여
오늘은 또 누굴 만나 도를 깨칠까
누굴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길까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길 나서서 만난 사람들 내 스승이었고
집에 있을 때 찾아온 사람들 내 적수였네
혜초 수물아홉에 여행 마쳤네
장안 천복사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오래오래 머물기로 했네
부처가 갔던 길의 뜻을 거기서 찾으려고
..............................................
세상의 모든 길
-혜초의 길 23
걸어간 사람들이 길을 만드는 법
길은
가고자 하는 마음이 만드는 법
세상의 모든 길은
내 앞의 사람들이 만들었다
혜초에 앞서 현장*이 걸었고
현장에 앞서 부처가 걸었던 길
어디는 길 나서서 보라
내 앞에 걸어간 사람들의 수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테니
*현장(玄奘, 602-64): 중국의 승려, 629년부터 645년까지 인도를 거쳐 여행하고 돌아와 여행기 『大唐西域記』를 썼다
...........................
외길
-혜초의 길 45
이 드넓은 데칸고원에
길은 오직 하나
이 적막한 파미르고원에
외길이 외롭게 나 있다
서역의 어느 하늘 아래서 끝나는
동녘의 어느 바다 앞에서 끝나는
길이 없을까 무슨 길이
길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 있다
길을 걸어야지 길동무도 만나고
길로 나서야지 길눈도 밝아지더라
올곧은 길만 길은 아니더라
내 걸음 멈추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뿐
지름길도 에움길도
길이기에 길로 이어지고
그날도 혜초는
길이 나 있기에 길로 나셨으리
나도 이 외길이 좋아서
오늘도 길 나선다 내 앞에 길 있기에
..............................
이정표 앞에서
-혜초의 길 46
이제는 늙은이 주름살 같은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처녀 젖가슴 같은 길을 걷는다
곧게 가는 길도
굽어 도는 길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그게 바로 길이더라
이 세상 이정표는
알고 보니 다 저승으로 나 있더라만
어느 이정표도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그곳으로 가면 길이 열리더라
둘러가는 길도
질러가는 길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그게 바로 길이더라
어제는 갓난애 피부 같은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아토피 앓는 내 자식 피부 같은 길을 걷는다
................................................
땅과 집과 길
-혜초의 길 47
나라마다 국경선은 수십 번도 더 바뀌었으리
땅 한 평 더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목숨을 버리고
집 나서면 세상의 길은
모두 그대 길이었으리
땅은 주인이 있지만
길은 만인의 것
신분증도 여권도 없었을 혜초
불자이기에 국경선을 그냥 넘어갔겠지만
해가 지면 잠자리는 매번 어떻게 마련했을까
집값 오르니 오년 번 돈보다 더 많은 수익
집값 떨어지니 오년 번 돈보다 더한 손실
나 이 좁은 땅에서
아파트 평수 넓히고자 안달복달인데
혜초, 그대는
그 많은 길의 주인이었구나
그대가 걸어 길을 길들였구나
(출천 스토리문학 9/10월호, 2010년)
'나의 문학 > 새책 또는 글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승범 선생님으로 부터 온 편지 (0) | 2010.12.09 |
---|---|
장문의 시조 (0) | 2010.10.17 |
이지연의 시조와 비평(김문억) (0) | 2010.10.17 |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안산1대 사회복지과 교수 (0) | 2010.09.19 |
퍼온글-미국에서 치룬 한국어 시험 중에서 궁금한 것 몇 개 (0) | 201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