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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의 시조와 비평(김문억)

설정(일산) 2010. 10. 17. 05:57

울산바위 올라 보니 외 4편

 

이지연

 

허공 속 쇠사다리 위만 보고 오르느니

문득 발 아래 협곡, 입 벌린 맹수 같아

한 발도 나아 갈 수도 물러 설 수도 없네

 

한 생각 삐끗하면 천지가 다 흔들리어

마침내 마음 다져 다다른 금강 계단

너와 나 사라진 경계 딛고선 석판 한 장

 

.............................................

빗속 하산

 

끊겼다가 이어지는

물미역 같은 산길

내 마음 산새처럼 드높이 날고 싶지만

빗방울 우산 속에도 한 세상 열려 오네

 

보일 듯 안 보이는

는개는 수수께끼

길 잃은 사슴처럼 나도 한 낱 미물인거

물안개 살며시 가리고 비파 타는 산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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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누군가 올 것 만 같아

나 여기 촛불 밝히고

길섶에 섰음이여

제 허물 소 롯이 벗은 자리

별빛 총총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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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소리

날개를 가지고도 날 수없는 슬픔이여

하늘의 뜻이던가 새벽을 깨우는 소리

벼슬은 불꽃의 직유

꼬리는 힘의 은유

 

인간 말세 살아남은 축생의 윤회에도

홰를 치며 날아오를 둥지 없는 세상에

꼬끼요 뜨거운 외침

지혜의 눈을 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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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 시화호

 

사람아 갈대꽃이 하마 가을을 지우려한다

이 한철 가기 전에 예 한번 와보아라

갈바람 날숨 들숨의 삶과 죽음 보이느니

 

한 물결 일어나면 한 물결 쓰러지고

물새는 한가로이 전율을 타고 있네

여기는 아버지의 바다, 몸살 앓는 낙일 하나

 

억새밭 고라니도 이 계절 서러운 눈빛

철새들 작별 인사, 저 눈부신 군무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자 손 흔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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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약력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한국 시조 시인 협회 공로상, 한국 시조시인 협회 이사

한국 시조여성 문학회 이사 역임

시집 『미루나무의새』 외 다섯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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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석판 한 장 딛고 선 이지연 시인에게-

 

                                        글: 김문억

 

 

오래간만에 꼼꼼한 관심으로 시조를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연 시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화들짝 정신이 들었습니다 깊은 뜻을 쉽게 표현 해 주어서 읽는 재미가 더했습니다. 소문 없는 시인이라서 작품도 별 볼일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나는 평생토록 시조만 쓰면서도 몇 년 사이 시조 읽기에 흥미를 놓쳤습니다.

시조를 읽다가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습니다. 표현하는 시적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허공에 대고 합죽이 인절미 먹는 소리로 웅얼거리는(흥얼거림이 아님) 뼈 없는 이야기가 그렇고 최근 들어서는 낯설기 경쟁에 뛰어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시조가 시의 연결고리와 통일성을 파괴하면서 뻐드렁니 얼음 깨무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이야기가 없는 시조는 읽기에 너무 지루하고 지나친 은유나 건너뛰기는 이해의 맥을 끊어 놓기도 합니다. 우리 말 발굴을 하겠다는 품신인지는 모르지만 쓰지도 않는 생경한 말을 의도적으로 집어내서 한 몫 보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읽혀지지가 않아서 짜증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 한 편 감상하자고 일일이 사전 찾아 볼 일도 못 되고 골치가 아픕니다. 같은 동네 사는 평자는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현대인의 삶의 고뇌를 자신만의 표현 기법으로 ”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종장에 와서는 시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또 어쩌구저쩌구 하는 지극히 현학적인 폼 잡기로 편들기를 하므로 시조 읽기에 흥미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해를 하고 싶어서 따라잡기를 해 보려고 머리카락을 곧추세워 보다가 지금은 지쳐서 물러나 있는 입장입니다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늦은 시간 산에 오르기를 즐기던 내가 어스름을 밟고 천축사 골짜기를 오르고 있을 때 몇 발짝 앞에 바랑 하나 달랑 짊어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비구니승을 만났습니다 어찌 이렇게 큰 산을 혼자서 오르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쓸쓸하다는 것 때문에 어떤 연민의 정 같은 것이 뜨끈하게 샘솟아 올랐습니다. 그 때부터 잿빛 나목들이 일제히 나와함께 스님 뒤를 따르기 시작 했습니다

스님도 어지러운 가을이 있었나 봅니다 마른 잎 다 털어내고 앙상하게 야윈 아주 작은 몸으로 천만근 바랑을 지고 짐 부릴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가랑잎만한 뒷모습이 애처롭게 이쁘기만 했습니다. 그 모습에서 지연 시인을 보았습니다

내가 아는 스님으로는 지연시인 뿐이면서 산새알 물새알 같이 눈물나도록 자그마한 시인도 지연스님이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아서 작은 시인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낮추고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산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회색 빛 겨울삽화 속에서 지연 스님을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떠도는 만다라 앞에 앉았습니다.

  수락과 도봉 사이에 자리 잡은 산골짜기 우리 동네는 댕기머리 보름달이 훨훨 날아가는 아주 멋스런 하늘이 있습니다.

달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나는 중랑천 길을 걸으면서 또 달빛과 함께 사랑을 하면서 시를 쓰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랑천 맑은 물에 빠져있는 달무리에서는 옥중에 춘향이가 형틀을 목에 걸고 한 대목 소리를 뽑아 올리는 가락이 들려옵니다.

애지게 높이 떠서 가는 징고의 푸른 달빛에서 포르라니 삭발을 한 스님의 모습을 봅니다

말할 듯 말할 듯 입 한 번 떼지 않고 눈길은 마주쳐도 정은 주지 않는 단호하고 냉정하면서 고고한 그 자태에서 한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받은 작품에서 또한 빈 하늘을 가득 채우고 가는 달빛을 발견합니다.

 

깊은 산 구름 속에 누군가 올 것 만 같아/나 여기 촛불 밝히고 길섶에 섰음이여/제 허물 소롯이 벗은 자리 별빛 총총 사랑 이야기

 

지연 시인이 산나리 꽃이 되던 밤도 지등 같은 달밤이었을 것입니다 촛불을 가슴에 켜고 오래도록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었던 그 영롱한 별빛과의 사랑 이야기도 달밤에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시인이 갈망하고 기다렸던 그 누군가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득도의 수행 길을 가던 밤도 환한 달빛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산나리 꽃 한 송이가 온 산을 환히 밝히고 있는 산중이었겠지요. 달빛 속에서 목탁 소리와 함께 염불 소리가 환하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두고두고 나그네의 길섶일 수밖에 없는 고난의 수행 길을 가고 있는 시인의 세계는 어두울수록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을 등대로 삼았을 것입니다.  

 

울산바위를 오르고 있다구요. 높은 곳으로 가고 있는 울산바위는 당신의 신앙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도착 지점 이었던가요

하늘과 땅,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연결하고자 했던 당신의 신앙적 믿음이 아스라한 허공에 아찔한 사다리를 놓게 했던 것인가요. 그 곳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으셨던가요. 더 나가지도 물러설 수도 없었던 수많은 번민의 세월을 혼자서 어찌 다 이겨 냈던가요

 

한 생각 삐끗하면 천지가 다 흔들리어

마침내 마음 다져 다다른 금강 계단 

너와 나 사라진 경계 딛고선 석판 한 장

 

가슴이 왈칵 메여옵니다. 그러셨군요. 그냥 놀이삼아 울산바위에 오르는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얼른 짐작할 수 있는 신앙적 고백서입니다 아니 인생 고백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한계단도 헛되이 할 수 없는 고행의 사다리는 온몸을 던져서 오를만한 금강 계단이었습니다. 견고하고 믿음이 가서 마음 줄 수 있는 구도의 계단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확고한 계단입니다. 온몸을 던져서 믿었던 견고한 석판 한 장을 딛고 서 있는 탈속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시 한 편으로 자신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요 멋입니다. 좋은 시를 감상할 때 마다 이 시를 쓰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시로 표현하는 창작 과정도 중요하지만 시를 쓸 수 있는 동기부여가 오기까지의 진한 삶의 역정에 수고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오래도록 고여 올라 잘 숙성된 술을 퍼서 서녘 하늘에 마구 뿌려놓은 황홀한 놀빛을 보고 있습니다. 만수무강 하옵소서.

 

숲길을 걷고 있는 고라니가 또 보입니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물미역 같이 미끄럽기만 한 살길입니다.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산길입니다. 산과 산이 서로 만나서 더 큰 산을 이루고 산 따라 흐르는 물길 따라 다시 길을 열어 가고 있는  외로운 고라니를 봅니다. 막아 선 산을 넘고 나면 다른 산이 또 길을 막고 무거운 산하나 부리고 나면 등허리로 다시 기어오르는 고난의 산입니다. 보일 듯 안 보이는 수수께끼 는개를 찾아 욕망은 펄쩍 높은 산으로 뛰어 오르고 싶었지만 오롯이 펼쳐 든 우산 하나도 아늑한 한 채 집이었습니다. 백중 날 호박잎만한 우산 하나 펼쳐 들고서도 한 세상이 열려온다 하셨으니 어지간히 산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그려. 아멘.목탁.

 

다시 닭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새벽을 깨워 아침을 여는 뜨거운 외침 속에서 새벽 공양을 위한 목탁 소리도 들려옵니다. 하루치의 생명이 날아오를 둥지 없는 삭막한 세상이지만 목청을 뽑아 올리는 지혜로운 목탁 소리가 닭 울음 속에서 들려옵니다.

 

벼슬은 불꽃의 직유

꼬리는 힘의 은유

 

이쯤 되면 시적 사물 앞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혜안을 갖고 계십니다

신라적 화랑의 출중한 투구처럼 붉고 화려한 닭 벼슬은 높은 곳을 향하는 불꽃의 직유면서 땅으로 휘어  내린 꼬리를 일컬어 힘의 은유 라 했습니다. 상대적 비유가 가히 절묘합니다.

어차피 시는 큰 틀에서 대상의 비유입니다. 비유만 잘 해도 절반은 성공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날의 시조를 안 읽는다는 문제 중에서 작가가 지어야 할 책임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직접 비유는 작품의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 되면서 지나친 은유로 작품 전개를 하므로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쉽고 깊이 있게 표현할만한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렵게 써야만 돋보일 것이란 엉뚱한 인식입니다. 새로운 표현 능력으로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 생산은 시 창작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러나 그 새롭다는 것이 낯설고 어려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맺었으면 풀어주고 시치고 감치면서 말맛을 잘 살려내면 얼마던지 쉽고 깊은 시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닭소리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갈대꽃이 하마 가을을 지우다니요

이렇게 자연을 마구 뒤집어서 도치할 수 있는 것 역시 시라고 하는 언어의 힘이었네요 들숨 날숨의 갈바람 소리마저 들으면서 삶과 죽음까지 보았다니요

하루라고 하는 위대한 시간을 가득 채우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다비를 하는 거룩한 석양을 보며 외롭고도 넉넉한 품 아버지의 바다라고 했네요. 어쩌면 그 바다는 우리의 아버지이면서 신앙적 아버지의 바다였습니다. 참으로 시의 눈이 깊고도 넓으십니다.

그 품 안에 안겨있는 서러운 눈빛의 고라니는 분명 지연시인의 순하고 맑은 모습입니다. 겁 많고 순박한 산 속 짐승입니다. 장마철이면 동굴 속에서 비 그치기만 기다리면서, 고사목이 쓰러지는 폭설 이 내릴 때는 긴긴 겨울 산 중에서 고립되어 있는 연약한 고라니를 생각합니다. 소유 해 놓은 것도 없고 소유하고 싶지도 않았던 구도의 길을 가다가 잠자리마저 불길 속에서 재가 되었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들었습니다. 폭설이 온 산을 점령하는 계엄의 겨울이 계속되면 배고픈 고라니의 눈빛을 생각 했습니다.  

 

그토록 쬐끄만한 사람이 어쩌자구 태백준령 깊은 곳으로 들어갔는지요. 더구나 절간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면서 시집을 다시 달라고 할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인생살이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데 어쩌겠습니까. 다급한 나머지 춘향이 꿈 해몽하던 허 봉사에게 물어 봤지요.

“그 불 참 잘 났다. 장히 좋다. 산 중에 불길이 솟구쳤으니 봉화烽火.로구나. 멀리서 가까이서 만인이 쳐다볼 수라. 집이 무너지고 평지를 이루었으니 새 집을 지으면 크게 될 운수요 시책이 다 타버렸으니 새 작품을 부지런히 써야 할 터. 좋다. 쌍무지개 뜰 수라. 참고 견디면 얼마 안 남았네.

 

그러면서도 이제 다시 절을 지으려거든 드넓은 바닷가 아니면 서울 같은 대도시로 나오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펼쳐진 곳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부처님을 찾았으면 합니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산 속이나 책 속에는 부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속세라는 상자 같은 이름을 달지 말고 그냥 우리 동네에 절을 짓고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좋은 시를 더 썼으면 합니다. 이런 시만 더 생산을 해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양식이 될 것이며 시만 잘 써도 부처님이 예쁘게 봐 줄 것 같습니다. 꼬드기는 얘기가 아닙니다요.

 

꼬끼오! 꼬끼오!

해방둥이 장 탉 한 마리가 화답 시를 올립니다. 몇 편의 두툼한 시조를 읽고 보니 떡 얻어먹고 빈 접시만 보내는 것 같아 설익은 시조 한 수 담아봅니다

  얘기 난 김에 한마디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시조는 역시 단수 짓기로 돌아가야 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국민시가 되어야 하다는 것과 시조문학의 새로운 열림으로 기존에 있는 사설시조를 모든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를 제안합니다.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분명하고 올곧은 삶의 지팡이를 잡고 가는 지연 시인의 시조를 읽은 오늘은 내내 행복합니다. 좋은 작품 또 기다리겠습니다. 서울 오시면 전화 하셔요 우리 동네에는 사철 복사꽃이 피는 그늘 아래서 마실 수 있는 잘 익은 술이 있습니다요. 아프지 말고 여름을 잘 건너갔으면 합니다. 아멘. 목탁.

 

무심히 발에 채이던 말 못하는 돌을 모아

누구가 마음 심어 탑으로 싸 올렸다

마침내 말문이 터져 염불하며 서 있는 돌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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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억 시인은 1983 년 월간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오른 후 <문틈으로 비친 오후> 외 몇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출천: 월간 스토리문학 9/10월호, 2010년)